<광주전남여성운동사9>광주학생독립운동 참여한 꽃다운 소녀(4)
<광주전남여성운동사9>광주학생독립운동 참여한 꽃다운 소녀(4)
  • 김다이 기자
  • 승인 2012.08.09 13:2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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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지동맹의 ‘왜곡된 진실’ 바로잡기

▲항일운동 애국지사 최순덕(102)씨와 그녀의 딸 이재순씨가 앨범을 보며 최 씨의 일대기를 회상하고 있다.
“어떤 명예욕이나 정부의 혜택을 받고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개인적인 포상보다는 역사적 진실이 바로 잡혀지기를 더 희망합니다” 올해로 102세를 맞이한 '백지동맹'의 주역 최순덕 선생의 소망이다.

여학생으로써 최대의 저항운동이었던 백지동맹. 그 백지동맹을 이끌었던 최순덕 선생은 아직까지 국가보훈처로부터 유공자 인정을 받지 못하고 있어 안타까움을 주고 있다. 나주통학열차 댕기머리 사건으로 알려진 이광춘 선생이 백지동맹의 주역이라는 타이틀로 독립유공자로 인정됐기 때문이다.

하지만 80여년이 지난 지금에도 국가는 진상을 재조명하지 않고, 뒤바뀌지 않은 채로 과거 신문보도를 그대로 인용하여 최초 백지동맹의 사건을 누락하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1932년 최순덕 선생의 결혼식 모습
최초 백지동맹 주역은 '최순덕'

최초 백지동맹은 1929년 11월 11일. 최순덕 선생은 동급생 박지의 집에서 밤새 호소문을 작성했다. 박지의 아버지는 당시 광주 부면장이었고, 광주여고보 사친회장을 맡고 있어 딸 박지가 연루된 이 사건을 확대시키지 않고자 했다.

이로 인해 그녀는 11월 17일 무기정학 후 이듬해 1월 퇴학처리로 사건이 일단락되고 언론보도도 없이 사라져버렸다. 또한 최 선생은 학교를 나가지 못하는 관계로 소녀회 활동을 하지 못했다.

반면 유일한 여학생 조직이었던 소녀회 회원들은 일제의 광주학생운동 사건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발각되어 박옥련, 장매성을 비롯한 나머지 회원들이 모두 검거되고 옥살이를 하게 됐다. 옥살이가 기준인지(?) 훗날 이들은 애족상을 수상하고 광복회 회원으로 인정받게 된다.

1932년 그녀는 22살 나이에 결혼을 했다. 그간 슬하에 7남 1녀를 낳고 오직 8남매를 키우며 살았다. 그러다 퇴학 후 24년이 넘어선 1954년 11월 3일에야 드디어 전남여고로부터 명예졸업장도 받게 됐다. 하지만 그녀의 마음 한켠에는 씁쓸한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애국지사 박옥련씨의 임종직전 곁을 지켜주었던 최순덕 선생
역사 속에 파묻힌 ‘백지동맹’의 진실

그녀가 주도했던 1929년 11월 11일 최초 벌어진 백지동맹은 사라지고, 1930년 1월 9일 벌어진 백지동맹이 최초인 듯, 주동자도 이광춘만 거론된 조선일보의 보도가 있었다.

최 선생은 눈물을 적시며 “어느 날 백지동맹의 주역이 뒤바뀌어 알려진 것을 보고 깜짝 놀랬다”며 “그리하여 국가보훈처에 지난 1999년, 2000년에 두 차례 독립유공자 신청을 했지만 증거불충분, 활동부족이라는 간단한 통보만 받고 퇴짜 맞았다”고 억울함을 호소했다.

당시 제출 서류는 광주학생독립운동에 활동했던 이광춘을 비롯한 박옥련, 박지도 인정한 “그 당시 주동자는 최순덕 언니다”는 내용을 육성으로 증언한 녹화 비디오테이프와 녹음자료, 인후보증서류, 각계 인사들의 서명까지 제출했지만 왜곡된 한 번 사실은 뒤바뀌지 않았다.

100여년의 세월을 지내온 그녀는 “올바른 것을 인정해주고 헛된 것을 잡아 역사를 바로 잡는 것이 정부에서 하는 일이 아니겠느냐”며 “사실 확인조사도 하지 않고 의문조차 갖지 않는 나라의 대응이 서글프다”며 떨리는 목소리를 힘주어 이야기했다.

▲2005년 5월 3일 전남여고 교정에 최순덕 선생을 위한 기념식수가 만들어졌다.(당시 94세)
▲항일운동으로 퇴학을 당했던 최순덕 선생은 1954년 11월 3일 전남여고로부터 명예졸업장을 받게 됐다
독립운동 이후 활발한 사회활동

이렇듯 최 선생은 평생을 한결같이 민족운동에 투신해 왔다. 이 모든 상황을 알게 된 전남여고 동창회 31회 김용임 회장은 지난 2005년 5월 3일 모교 교정에 조촐하게 기념식수 및 조그마한 표지석을 제작하여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지 못했던 최 선생의 설움을 덜어줬다.

한편 그녀는 독립운동 이후에도 여성으로써 다양한 여성 사회운동을 활발히 펼쳐왔다. 60년대에는 가난한 사람을 돕는 단체 빈첸시오회에서 1대 회장을 맡았다. 70년대에는 광주 최초로 천주교회 신협운동을 주도했다. 또 현재 태평양전쟁희생자유족회 후원회, 남북공동선언 실천연대 고문을 맡고 있다.

광주학생독립운동이 발생하고 83년이 지난 뒤. 최순덕 선생은 백지동맹의 진실을 밝히고 역사를 바로잡기 위해 102세의 노령의 나이임에 불구하고 증거가 될 만한 자료를 갖추고 있다.

최순덕 선생은 광주학생독립운동의 마지막 산증인이다. 내년이면 또 한 번 국가보훈처에 이의제기를 하고 신청서를 제출할 예정이라고 한다. 그녀의 간절한 소망인 ‘백지동맹’의 명확한 진상 규명을 통해 독립운동 공로를 인정받고 후손들이 역사를 바르게 배우는 계기가 되어야 할 것이다./김다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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