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이야기 41. 최치원(崔致遠) 선생 기념관
중국이야기 41. 최치원(崔致遠) 선생 기념관
  • 강원구 한중문화교류회 회장
  • 승인 2012.08.02 1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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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원구 박사
최치원 선생의 유적으로는 쌍계사에 직접 쓴 국보인 비석이 있고, 정읍의 피향정이 있다. 정읍의 태산사에 최치원 선생이 모셔져 있으며, 해운대 역시 최치원선생의 동상이 있고, 함양에 학사루가 있다.

당나라의 멸망을 재촉한 황소의 난 10년에 걸쳐 중국 동서남북을 거의 휩쓸었었다. 황제는 망명하고 장안을 점령한 황소는 황제로 등극한다. 이 대란의 와중에 신라인인 최치원은 어린 몸으로 당나라에 유학하고 있었다.

당시 절도사 고병의 참모인 종사관으로 있었는데 천하를 호령하고 있는 황소에게 격문을 지어 보낸 ‘토황소격문’이 유명하다.

그는 불의불충한 반란의 괴수로 안록산까지 거론하며 매도하고서 ‘하물며 너는 그들만도 못한 천한 것으로, 하는 짓도 불 지르고 살상하고 겁탈하는 것을 즐기고 다녔으니, 천하 사람들이 너 죽이기를 생각하고 있고 땅 아래 귀신까지 너 베어 죽이기를 의논했노라’ 했다. 황소가 최치원의 격서 바로 이 대목을 읽을 때 침상에서 굴러 떨어졌다 한다.

최치원선생이 869년 12세의 나이로 당나라에 유학하여, 874년 과거에 합격하였고, 879년 황소의 난에 ‘토황소격문(討黃巢檄文)’으로 이름을 남겼다. 최치원 선생이 고향을 그리워 지은 추야우중(秋夜雨中)이 유명하다.

가을바람 쓸쓸하게 읊나니,

세상 사람들이 내 마음을 알아주는 사람 없구나.

삼경인 한 밤중 창밖에 비가 내리고,

등불 앞에 내 마음은 만리에 가 있네

秋風唯苦吟 世路少知音

窓外三更雨 燈前萬里心

양주는 우리에게는 생소한 도시이지만, 당나라시대만 해도 대단히 발달된 곳이다. 신라인들이 집단으로 거주한 곳이 양주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곳이 조그만 도시로 전락된 내용이 노양주(老揚州)란 책에 철도를 놓는 것을 반대하고, 비행장을 밭으로 만들어 시끄러운 것을 들어오지 못하게 한 데서 유래되었다고 한 것을 보면 그럴 듯 했다.

신라시대 장보고장군이 신라방을 산동성 석도와 이곳 양주에도 설치하기도 했으나, 그 흔적은 찾아 볼 수 없지만 최치원선생 유적만 남아 있다.

2001년 당성유적지 박물관에 최치원선생 기념관이 잘 만들어져 있다. 최치원 선생이 양주에서 벼슬을 한 기록이 아직도 남아있다. 2층의 한 개 층을 전시실로 만든 것을 보면 그의 업적을 알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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