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전남여성운동사8>광주학생독립운동 참여한 꽃다운 소녀(3)
<광주전남여성운동사8>광주학생독립운동 참여한 꽃다운 소녀(3)
  • 김다이 기자
  • 승인 2012.07.30 10:0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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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산증인 ‘백지동맹’ 주역, 최순덕

▲백지동맹의 주역이었던 올해로 102세를 맞이한 최순덕 애국지사
나주 통학열차 댕기머리 사건으로 도화선이 된 1929년 11월 3일 광주학생독립운동. 이 모든 거친 시위 현장에는 어김없이 여성들도 뒤따라 나섰다. 올해 102세의 나이로 광주여고보(현 전남여고) 1회 출신인 최순덕 선생 역시 그중 한명이다. 그녀는 고령의 나이임에 불구하고 아직까지 소녀 같이 수줍은 미소를 지닌 사람이다.

최 선생의 가장 두드러진 사회운동은 광주학생독립운동 이후 여학생들이 일으킨 항거로 가장 유명한 ‘백지동맹’이다. 그녀는 이 모든 것을 주도했다. ‘백지동맹’이란 학생들이 시험을 볼 때 답안을 쓰지 않고 백지 상태로 제출하는 것으로 여성으로써 할 수 있는 강력한 비폭력 투쟁방법이었다.

추운 11월, 참혹했던 ‘일제의 만행’

최 선생은 7남 1녀를 낳고 현재 광주 서구 화정동에서 하나뿐인 딸(이재순)과 함께 살아가고 있다. 그녀는 102세라는 나이가 믿기지 않을 정도로 아직까지 그날의 기억을 생생하게 기억한다. 현재 생존해 있는 유일한 ‘여성운동사의 산증인’이라 불러도 부족함이 없다.

1911년 광주에서 태어난 최순덕 선생은 아버지의 반대임에 불구하고 어머니의 남다른 계몽의식 덕분에 1920년 광주 서석초등학교에 입학 하게 됐다. 여성으로써 교육받기 힘들었던 시절. 1927년 광주 여자고등보통학교를 입학하게 되고, 1929년 당시 최고학년 3학년 반장을 맡았다. 하지만 그녀는 꽃다운 나이에 책과 연필 대신 일본 경찰에게 던질 돌멩이를 집어 들었다.

11월 3일 이후 시위대열은 점점 늘어나 항쟁으로 확대됐다. 아직도 시위 현장을 생생하게 기억하는 최 선생은 “일본 경찰은 지금 광주 우체국 자리에 소방차를 대기해 놓고 물대포를 쏘아댔었지. 11월의 쌀쌀한 바람에 물벼락을 맞은 우리들은 치마와 저고리에 고드름이 달릴 정도였어..”라고 말한다.

시위는 매일 반복됐다. 반장이었던 최 선생은 광주여고보 학생들을 광주역으로 인솔하고 시위에 참여했다. 치마폭에는 돌을 담아 시위대에게 날러주며, 물주전자와 약품을 챙겨 남학생들에게 지원했다.

▲친구 전의영 집에서 피신중, 위로차 찾아오신 광주여고보 문남식 선생님(맨 좌측)과 함께.(맨 우측이 최순덕 선생)
일경 피해 ‘백지동맹’ 호소문 작성

이후 많은 학생들이 구속됐다. 그러다 중간고사를 하루 앞둔 11월 10일. 광주고보 학생인 이경채가 광주여고보의 대표를 맡고 있는 그녀를 찾아왔다. 일제에 맞서 시험 거부하는 백지동맹을 결의하자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녀는 이경채를 따라 여학생 신분으로 혼자 비밀조직에 참석했다. 그곳엔 제일고보생, 농고생, 사범학교 학생 대표가 모인 자리었다. 광주여고보 대표로 참석한 최순덕 학생은 백지동맹 결성의 필요성을 깨닫고, 그 자리에서 사람들과 논의하여 바로 호소문 초안을 작성했다.

초안을 떨리는 마음으로 들고 나왔었던 최 선생은 “초안 내용은 ‘시험지에 한 글자도 쓰지말자! 연필도 잡지말자! 시험지를 받으면 그대로 덮고 운동장으로 나가자!’라고 썼었다”면서 “그날 밖으로 나오자마자 이경채는 일본 순경의 눈에 띄지 않도록 인력거를 잡아주었고, 그길로 곧장 나는 동기동창 박지의 집으로 향했다”고 설명한다.

박지의 집에 도착한 최순덕은 박지에게 백지동맹의 취지를 말하고, 돕겠다는 승낙을 흔쾌히 받았다. 이날 박지와 최순덕은 박지의 아버지의 눈길을 피해 고모의 작은 골방에서 밤을 새워가며 백지동맹 호소문 150장을 손수 자필로 써가며 준비했다. (당시 1,2,3학년은 각 한 학급만 있었고, 인원수는 50명씩이었다.)

‘무기정학’ 이후 ‘강제퇴학’

시험 당일 11월 11일. 최 선생은 일본 순경의 눈을 피하기 위해 혼자서 이른 아침 150장의 호소문을 가슴에 숨겨 인력거를 타고 학교에 갔다. 학교에 도착한 최순덕은 1,2,3학년 각 교실을 뛰어다니며 각각 책상위에 호소문을 붙이고 다녔다. 칠판에는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구호를 지웠다 썼다를 되풀이 했다.

이윽고 시험이 시작되고 호소문을 보게 된 광주여고보 학생들은 모두 일심동체가 되어 시험지를 백지로 제출하고 운동장에 모이게 됐다. 운동장에서는 “구속학생 즉각 석방하라. 일본인들은 자기나라로 돌아가라”고 구호를 외치며 시험기간 일주일 내내 시위를 전개했다.

한편 최 선생은 그 당시를 떠올리며 “무섭기도 했지만 운동장에 모두 모이니까 든든하고 그렇게 힘이 많이 났다”면서 “여학생이 몸 바쳐 나가 투쟁을 하는데 겁도 없었고 우리 세상이 된 것만 같았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녀는 11월 17일. 담임선생님을 통해 무기정학 첫 번째 대상자라는 통보를 받게됐다. 이후 일제는 ‘백지동맹’을 주도했던 최순덕에게 1930년 1월 31일 강제퇴학이라는 이름으로 졸업의 기회를 잔인하게 짓밟았다./김다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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