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이야기 40. 수양버들이 넘실대는 양주(揚州)
중국이야기 40. 수양버들이 넘실대는 양주(揚州)
  • 강원구 한중문화교류회 회장
  • 승인 2012.07.26 12: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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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원구 박사

양주는 옛날에 광릉(廣陵), 계원(桂苑), 강도(江都), 한강(邗江) 등으로 불리었다. 양주는 물안개가 자욱한 3월이 유명하다. 당나라 시대 이백이 무한의 황학루(黃鶴樓)에서 절친한 친구인 맹호연이 양주에 벼슬하러 갈 때 서로 헤어지면서 지은 ‘연화삼월하양주(煙花三月下揚州)’란 시가 유명하다. 그 시의 내용은 이렇다. 

서쪽 황학루에서 친구를 이별을 하고, 물안개 자욱한 삼월 양주로 가는구나

배는 멀리 푸른 허공에 아물거리고, 끝없이 흐르는 양자강의 물줄기만 보이는구나

고인서사황학루(故人西辭黃鶴樓)

연화삼월하양주(煙花三月下揚州)

고범원영벽공진(孤帆遠影碧空盡)

유견장강천제류(惟見長江天際流)

 양주는 당나라와 송나라 때 강남에서 가장 번성한 도시였다. 그래서 당시 한량들의 꿈은 허리에 10만관의 돈을 차고 양주에 가서 맛있는 음식을 먹으며 미인과 노는 것이었다. 그런 점에서 이 시구 속에는 당대 한량들이 가졌던 낭만적 희망사항이 들어 있는 셈이다.

양주는 매년 4월에 관광축제를 열고 있다. 이곳엔 항주의 서호보다 아름다운 수서호(瘦西湖)가 있는데 ‘날씬한 서호’란 뜻이다. 원래 이름은 보장호(保障湖)였다. 청나라 건륭황제가 6차례나 다녀간 곳으로 유명하다.

수서호는 여러 사람들의 정원을 하나로 묶었다고 보아야 한다. 대표적인 정원이 서원(徐園), 소금산(小金山)이다. 소금산 안에 들어가면 괴상한 돌멩이 하나에 하나의 정원이 만들어져 있다.

양쪽에 수양버들이 늘어지게 있으며, 물위에는 뱃사공들이 양주의 민요를 부르면서 사람들을 끌고 있다. 몇년 전에 한국에서도 인기가 높았던 드라마 ‘황제의 딸’이 이곳에서 촬영된 곳이며, 대만이나 홍콩에서 이곳을 배경으로 영화를 많이 촬영한 곳으로 유명하다.

지금은 낚시질을 못하지만 옛날에 낚시를 즐겼던 조어대(釣魚臺)가 있고, 멀리 백탑(白塔)이 한 눈에 보이며, 아름다운 연화교(蓮花橋) 밑으로 배가 다니게 되어 있다. 양주를 나타내는 배경은 다름 아닌 호수 속에 있는 연화교이다.

이곳에 아름다운 정원인 개원(个園)과 하원(何園)이 있다. 소주의 졸정원보다 작지만, 조형미는 더욱 아름답고, 개원은 대나무가 많아 대나무 개(个)자를 사용하였다. 옛날 양주는 소금 장수들이 많아 그들이 많든 인공 정원이다.

양주에서 가장 큰 절인 대명사는 당나라시대 일본에 불교를 전파한 감진(鑒眞)스님이 유명하며 9층탑이 잇다. 절 내에는 서예가인 구양수를 모시는 곳과 중국의 다섯 번째로 유명한 천하 제5천이 있다. 이 절은 시내 한복판에 문창각(文昌閣)이라는 건물을 중앙으로 하여 발달했으며, 시내는 깨끗하고 잘 가꿔진 곳이며, 강택민의 고향이기도 하다.

1482년 2월 29일 제주도 정의현감이었던 이섬(李暹)이 한양으로 오다 함께 탄 47명과 함께 10일간 표류하다 양주 장사진(長沙鎭)에 표류하여 도착한 일이 있다. 그가 행록(行錄)이란 글을 남겼는데, 47명중 14명은 죽고 33명만 살았다.

1488년 최부 선생 일행이 표류하다 양주를 지나자 이런 이야기를 듣게 된다. 그는 양주는 호수가 아름답고, 노래 소리가 끊이지 않고 있어 배를 타고 가기 때문에 볼 수 없었다는 기록을 보면, 이곳은 옛날부터 가무가 발달한 곳이기도 한 모양이었다.

양주에는 수나라 양제의 묘가 있다. 수양제는 고구려에 침략하였으나, 대패 당하고 난 후 신하 앞에서 죽임을 당해야 했다. 그는 약을 마시고 죽기를 바랐으나, 별동대군을 이끌고 살수대첩에서 패한 우문술의 아들 우문화급(宇文化及)에 의해 목 졸려 죽었다. 그의 능(陵)이 양주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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