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현대역사기행 1> 보성에서 만난 백범 김구 선생
<근현대역사기행 1> 보성에서 만난 백범 김구 선생
  • 정인서 기자
  • 승인 2012.07.26 08:2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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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하에서 5.18까지 우리 주체성 찾아
지역을 되돌아보는 살아있는 역사 현장
참가자들 이구동성 “정말 오길 잘했다”

▲ 보성가는 길 쇠실쉼터에 있는 김구선생 은거지 안내 팻말
역사는 단순한 과거가 아니라 오늘을 웅변해주는 하나의 좌표이다. 그래서 오늘과 미래를 알기 위해서는 우리의 역사에 대한 철저한 인식이 필요하다. 광주전남민주화운동동지회가 광주시의 후원을 받아 두 차례의 ‘한국 근현대 역사문화기행’을 마련했다. 첫 번째 행사가 지난 21일 보성의 윤윤기 선생이 일궜던 천포간이학교와 양정원 터 그리고 한국전쟁 당시 김선우 전남도당 유격대 사령관 생가 터를 둘러봤다. 영암(유혁 선생 생가)과 함평(김철 선생 기념관), 영광(박관현 열사 생가) 등지를 방문했다. <시민의 소리>는 답사에 동행 취재해 현장의 목소리를 생생하게 전달한다.<편집자 주>

박동기 선생의 해박한 호적 정리

토요일 아침 8시, 동구청 주차장에 모인 답사단 일행들은 설레는 마음이었다. 그동안 민주화운동, 통일운동 등을 펼치면서도 역사현장에 대한 발걸음이 부족했던 탓인지 모두들 “참으로 좋은 기회”라며 인사를 나누었다. 주최 측은 “버스 한 대를 준비했는데 얼마나 올지 모르겠다”고 우려했으나 다른 승합차량을 두 대나 더 동원할 정도로 참가자가 65명에 이르렀다.
버스에 탄 참가자들은 머리가 허연 80대의 통일운동가로부터 10대 초등학생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모습이었다. 차가 출발하자 보성 윤윤기 선생의 천포간이학교(회천동초교)까지 가는 데는 1시간 30분여 걸린다고 한다. 아직은 서먹한 분위기였지만 광민회 현대사연구위원회 박동기 선생의 해박한 ‘호적계장’의 솜씨로 참가자들의 '호적을 정리하며' 인사를 나누었다.
참가자들 중에는 이번 역사기행의 인물들과 관련된 가족들도 함께 동승했다. 윤윤기 선생의 둘째딸인 윤종순과 고등학교 국어교사인 손녀 그리고 제자인 오연숙(81), 김선우 유격대 사령관의 동생 김결, 박관현 열사의 누나인 박행순과 매형 등이 함께 했다.
또 일행 중에는 김정길 6·15공동위원회 광주전남본부 상임대표를 비롯하여 박정희 유신체제 하에서 지난 1971년 통혁당 사건 당시 호남지역 총책을 맡은 혐의(당시 반공법 위반)로 붙잡혀 15년간 복역한 기세문씨(79), 김대중 전 대통령 비서관 최경환씨(53), 광주시 인권담당관 이경률씨(52) 등도 보였다.

쇠실쉼터의 김구선생 은거추모비

▲ 조선대 이종범 교수가 이번 근현대역사기행의 해설을 맡아 김구선생의 활동상을 설명하고 있다.
역사기행단이 탄 버스는 지난 며칠 동안의 무더위를 잘 견뎌낸듯 했다. 하늘이 맑아 오늘 날씨는 제법 더울 듯 싶었다. 버스가 보성 방면으로 50분여 달리더니 중간휴게소에 잠시 쉬었다. 보성군 득량면 삼정리 쇠실쉼터였다.
이곳에 정차한 목적은 화장실이 아니라 ‘백범 김구 선생 은거추모비’가 있기 때문이었다. 이 비는 1990년 3월 백범 김구선생기녑사업추진회가 설립했다. 이종범 조선대 교수의 해설이 이어졌다. 보성을 중심으로 수많은 독립운동가, 교육자들이 배출됐고 보성과는 아무런 연고가 없는 이들도 보성에서 활동하는 등 기(氣)가 살아있는 동네가 바로 보성이라는 이야기였다. 그러면서 백범 김구(1876~1949) 선생의 보성과의 인연을 풀어나갔다.
김구 선생은 국모인 명성황후를 살해한 일제를 응징하기 위해 일본장교를 살해하고 인천감옥에 있던 중 1898년 3월 탈옥하여 5월께 보성 쇠실마을의 종친 광언 김승묵의 집에서 45일 정도 은거했다. 득량면 기러기재 왼쪽으로 깊은 산골과 울창한 숲 속이 펼쳐져 있는데, 이곳이 바로 득량면 삼정리 쇠실마을이다.
이 마을은 지금은 국도에서 보이지만 옛날에는 골짜기에 가려서 전혀 보이지 않는 깊은 곳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마을에 들어서면 넓고 따뜻해 마을을 이루기에 좋은 곳이지만 밖에서는 눈에 띄지 않아 은둔지나 피난처로 이용되기도 했다.

22세에 쓴 한시 離別難

이 당시 나이가 22세였고 이름은 ‘김두호’라 하였다. 그리고 이곳에서 광언(光彦), 덕언(德彦), 사중(四重)과 더불어 시대상을 논하고 중국역사가 아닌 우리 역사인 동국사기를 공부하며 민족정기를 일깨웠다는 것이다.
김구 선생은 은거지를 떠날 때 그를 따라가겠다는 일꾼들도 여럿 있었다고 전해진다. 김 구 선생은 나중에 자리 잡으면 부르겠다며 만류하였는데 그의 친화력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그리고 그간 보살펴 준 은덕에 감사하며 이 집의 종친 광언에게 한국 역사책을 남겼다. 책의 속표지에 이별을 아쉬워하는 ‘이별난(離別難)’이라는 한시 한수와 김두호라는 서명이 있다.

離別難離別難 離別難處花樹開
花樹一枝分折半 半留宗家半帶行
生我天地逢何時 捨此江山去亦難
四員同遊至月餘 齟齬惜別而去也
"이별이란 어렵구나 이별이란 어렵구나 이별하기 어려운 곳에 일가의 정은 피어나고
꽃 한 가지를 반씩 나누어, 반 가지는 종가에 남겨 두고 반 가지는 갖고 떠나네
우리가 태어난 이 천지 무슨 때를 만났길래 이 강산을 뒤로하고 가기도 또한 어렵구나
네 벗이 함께 놀기 한 달이 넘었는데, 떠나기 아쉬운 정을 곱씹으며 떠나는구나."

▲ 쇠실쉼터에 설치된 김구 선생 추모비
해방 후 상해에서 귀국하자 김구 선생은 김기옥(김광언의 손자)에게 안부를 묻고 한번 방문하겠다는 편지를 보낸다. 그리고 이 마을을 떠난 지 48년이 지난 해방 이듬해인 1946년 9월 김두호가 아니라 민족의 지도자인 백범 김구가 되어 쇠실마을을 다시 찾았다. 김구 선생은 당시 쇠실마을을 다시 찾은 소감을 백범일지에 “감격에 넘치었다”고 적고 있다.

박근혜의 쿠데타 역사인식 ‘충격’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22세의 젊은이를 이 집의 할아버지를 비롯해 마을 사람들이 융숭한 대접을 했기 때문이다. 김기옥의 아들인 김태권 나주공고 교사와 김태기 전남대 교수는 “당시 김구 선생이 비록 떠돌이 신분이었지만 누가 보아도 범상한 사람이 아니었음을 추측케 한다”고 글을 남기기도 했다.
선생은 기거하던 방과 놀던 곳을 두루 살펴본 후 보답을 약속하고 떠났으나 불행히 74세 되어 안두희의 흉탄에 위대한 생애를 마쳤다. 안두희는 1996년 10월 인천시 중구 신흥동 자택에서 박기서에게 몽둥이로 맞아 피살되었다.
역사는 우리에게 귀중한 교훈을 남긴다. 그래서 늘 역사는 다시 되돌아봐야 한다. 김구 선생이 은거했던 집 앞에는 ‘백범 김구선생 은거기념관’이 있다. 이번 답사에서는 일정 때문에 방문하지 못해 내내 아쉬웠다. 이제 가까운 곳을 알았으니 다음에 가족과 함께 들려야 할 것으로 점찍어 놓았다.
최근 박근혜가 “아버지 박정희의 5.16은 최선의 선택이었기 때문에 이 문제를 역사의 판단에 맡겨야 한다”고 말했다. 헌법을 파괴하고 인권과 민주주의를 군화발로 유린한 군사반란을 구국의 혁명이자 최선의 올바른 선택이었다고 평가하는 그런 역사의식을 가진 딸이 대통령 후보로 거론되는 자체가 이 나라를 암울하게 만든다. 아니 김구 선생이 통탄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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