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양방죽 태봉산 복원하자 2>경양제 메우려 태봉산 헐던 광주시 정책
<경양방죽 태봉산 복원하자 2>경양제 메우려 태봉산 헐던 광주시 정책
  • 전남과학대학교 교수 정건재(동양사회사전공)
  • 승인 2012.07.23 18:0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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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시대 말기, 일본 건국기원 2600년(1940년) 기념사업으로 일본인 고급관리들을 위한 일본인 집단거주지 조성이 추진됐다. 1935년 10월 1일 광주읍 광주부 승격 무렵부터 야지마 전라남도지사를 중심으로 매립계획이 극비리에 추진되기 시작했다.

이에 맞서 광주 최흥종 목사(위원장), 광주읍 부읍장 박계일(朴癸一), 서석병원장 최영욱(해방후 전라남도지사), 동아일보 광주지국장 김용환(金容煥) 등을 중심으로 ‘경양방죽매립반대 투쟁위원회’를 결성, 조직적인 반대운동이 전개됐다.

최흥종 목사는 광주시와 전라남도를 방문해 “총독부가 있는 서울을 보더라도 덕수궁의 못이나 경복궁 경회루 연당 등이 그대로 남아 있는 사실을 상기시켜, 한 민족 한 지방의 역사적인 유산을 무자비하게 말살해버리는 것은 문화인의 수치가 아니겠느냐”는 등 7가지 내용의 진정서를 전달했다.

5백여년 생사고락 해온 경양제

진정서 내용은 다음과 같다.《광주시사》제2권,1993년11월30일 발행. 258-261쪽.
1. 광주 지방민 생활 직결 농업경영 원천이다. 광주시 경양제는 조선 세종 때 광주인 김방옹이 쌓은 5백년의 역사를 지닌 광주민생과 직결되는 농업경영의 원천지이다.

2. 홍수 때 수량 조절하여 피해를 줄여준다. 이 방죽물을 인수하여 농사짓는 몽리답은 수백 두락으로 송정리 평야까지 혜택을 주었다. 또한 치수정책에서 망각해서는 안 될 것은 무등산(해발 1187m의 고산)에서 내려 미는 급류의 세를 양파정에서 한 번 꺽어, 금정과 부동정 경계지점(현 적십자병원 뒤) 취수구에서 부동정․황금정․본정․명치정․동양통을 관류하는 소구거에 따라 광주천의 범람과 그리고 폭우가 쏟아질 때, 장원봉․두암․각화․풍향․경양 일대의 물을 저수지로 이끌어 완류케 함으로써 홍수의 피해도 막고 있다.

3. 큰 화재 발생 시 소화용수 공급이다. 광주의 수도 사정으로는 큰 화재가 돌발했을 때 소화수를 공급할 길이 없는 실정인 바, 경양지를 메워 버린다는 것은 대도시 광주건설의 장래로 보아 결코 현명한 시책이 아니다.

4. 방죽을 메우지 않더라도 광주시내 주택지 조성 적지 않다. 주택지 조성을 목적으로 한다면 담양가도․송정가도․장성가도 쪽으로 발전할 수 있다.

5. 대대로 이어온 농경문화의 역사적 문화유산 말살은 문화인의 수치이다. 총독부가 있는 서울을 보더라도 덕수궁의 못이나 경복궁 경회루 연당 등이 그대로 남아있는 사실을 상기시켜, 한민족 한지방의 역사적인 유산을 무자비하게 말살해버리는 것은 문화인의 수치라고 할 수 있다.

6. 장차 광주가 대도시로 발전할 때를 대비해서 경관이 수려한 풍치지구로 아름답게 보전되어야 한다. 그 외에도 장차 대도시 건설을 위해서는 경양제만한 저수지는 전에 있던 그대로 보존해야하며, 풍치지구로도 미화․정비할 필요가 있다.

7.특히 김방옹의 덕택으로 오백여년간 자자손손이 경양제 물로 농사를 짓고 살아온 우리 후세대 백성들이, 이 역사적인 경양지를 매립하여 버림은 벽해상전이라는 안타까운 현실 앞에 착잡한 심정을 달랠 수가 없음은 인지상정이다.

일제강점기의 일본인들조차도 경양지 매립은 ‘문화인의 수치’라는 ‘경양방죽 매립반대 투쟁 위원회’의 주장을 부분적으로 받아들여, 전면 매립이라는 당초 계획을 변경하여 일부(2/3)만 매립하고, 약 1만6천 평에 달하는 경양지는 남겨 놓았다. 이와 같이 경양지는 단순한 호수가 아니라 일제강점기 당국에서조차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던, 우리들과 5백여 년 간 생사고락을 함께 해온 한 민족 한 지방의 중요한 역사적인 유산이었던 것이다.

인조 때 아지왕자 태 묻었던 태봉산도 헐어

그러나 1960년대 중반까지 겨우 명맥을 유지해 오던 경양지는 광주시의 근시안적인 정책으로 없어져버리는 불운을 맞게 된다. 당시 광주시가 금남로 확장 등 시가지 정리 계획에 필요한 예산을 중앙정부에서 따오지 못하게 되자, 매립 면에 시가지를 조성해서 거기서 벌어들인 예산으로 충당했던 것이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경양지 매립에 인근의 태봉산을 헐어버린 토석을 이용했다는 점이다. 태봉산은 지금 광주역 자리에 있어서 경양지와 인접해 있었고, 높이 50m 정도의 작은 산이었다. 하지만 역사적 의미로 볼 때 조선 인조가 이괄의 난(1624년)을 맞아 공주에 피신하고 있던 중 아지(阿只)왕자를 낳아 그 태를 묻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결국 경양지 매립에 동원되었던 태봉산도 유물(태실(화강암), 백자태항아리, 금박, 명기석반(銘記石盤)(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등이 발견된 역사 유적지였던 곳이다.

∇태봉산(헐리기 전)과 화강암제 태실 유물


[광주시립민속박물관 정원]

1928년 7월, 태봉산에서 수습된 왕자의 태실 관련 유물로는 화강암제 태실(胎室:직경 130㎝,높이 62㎝)·백자태항아리·금박(金箔:길이 12.3㎝,넓이 4㎝, 무게 1돈5푼), 명기석반(銘記石盤) 등이 있는데, 석반의 기록은 다음과 같다.

“1624년 9월 3일 진시에 대군아지를 낳았고, 그 태를 1625년 3월 25일 묻는다.(皇明天啓 四年 九月初三日辰時 誕生王 王男大君阿只氏胎 天啓 五年三月二十五日藏)”

이와 같이 태봉산에서 발견된 태실과 유물들은 구전으로 내려오던 사실들을 입증하는 자료가 되었다.
그렇다면 광주시가 이렇게 태봉산을 헐어서, 경양지를 매립하는 방식은 어디서 배웠을까? 바로 30년 전 일제가 강행했던 매립 공사에 필요한 토석을 확보하기 위해 경호대(현 광주고, 계림초등학교 지역) 일대 봉우리를 헐어 매립했던 방식과 유사하다. 놀랍게도 해방 후 1960년대에 대한민국 광주시가 그대로 답습, 주변의 태봉산을 헐어 나머지 경양지를 메워버렸던 것이다.

이런 우여곡절 끝에 비운의 경양지는 1966년부터 본격적으로 공사가 시작되어 3년 만인 1968년에 우리 곁에서 모습을 감추게 되었다. 그리고 40여 년이 지난 오늘 날 거대한 역사적 망각 속에 빠져들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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