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이야기 38 - 임시정부(臨時政府)와 홍구공원(虹口公園)
중국이야기 38 - 임시정부(臨時政府)와 홍구공원(虹口公園)
  • 강원구 한중문화교류회 회장
  • 승인 2012.07.19 1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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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구 한중문화교류회 회장
상해 임시정부에 대해서는 역사 시간에 너무 많이 배워 잘 알고 있다. 상해시 마당로 보경리에 위치한 이 곳은 1840년 이후 프랑스 조계지였다. 임시정부가 있는 이 지역은 가로수가 플라타나스로 되어 있어 낙엽이 지면 보기가 흉하지만, 여름이 되면 거대한 숲을 이루어 보기 좋고, 요즈음은 높은 빌딩들이 숲을 이루고 있다.

1919년 3.1운동이후 대다수의 한국 지사들이 국내외에서 독립운동을 적극적으로 활동하기 시작했는데, 그 하나로 전체적인 독립운동을 이끌 수 있는 권위 있는 기구를 설립한 결과가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이었다.

3월 17일 비밀리에 상해로 망명해 온 여운형, 현순, 선우혁, 김철, 서병호, 최창식, 신규식 등이 당시 보창로(현 회해로)에서 조직하였다. 1919년 4월 13일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상해에서 수립했음을 선포하여 독립운동사의 한 획을 그었다.

임시정부 청사는 1945년 해방까지 27년간 상해를 비롯하여 항주(杭州), 가흥(嘉興), 진강(鎭江), 장사(長沙), 광주(廣州), 유주(柳州), 기강(綦江), 중경(重慶) 등으로 몇 차례 옮겨 다녔다.

임시정부의 대표적인 인물은 김구 선생이다. 그는 황해도 해주에서 태어나 한학을 공부하고 봉건사회에 대한 반감으로 동학에 가입했다. 명성황후의 원수를 갚기 위해 일본인 육군 중위를 살해한 혐의로 징역을 살기도 했으며, 3.1운동이 일어나자 상해로 건너갔다.

이곳 임시정부에는 92년 9월 노태우 대통령, 94년 3월 김영삼 대통령, 97년 1월 김구 선생의 아들 김신 장군, 8월 김수환 추기경, 98년 1월 김대중 대통령이 방문하여 기록을 남겼다. 이외에도 많은 유명한 사람들이 다녀갔다.

김구 선생이 좋아하며, 일생동안 애송했다는 서산대사의 시를 직접 쓴 액자가 70년대에 발견되었는데, 그 복사본이 쇼핑센터에 걸려 있다. 그 내용을 보면 ‘들에 내린 눈 위를 걸어갈 때는 함부로 걷지 마라, 오늘 걸어가는 발자국이 뒤에 따르는 사람의 길이 된다(踏雪野中去 不須胡亂行 今日我行蹟 遂作後人程)’이라는 글이다.

홍구공원은 윤봉길 의사가 폭탄을 투척한 곳으로 김구 선생에게 찾아가 독립운동의 의지를 밝히고 기회를 마련해줄 것을 요청했다. 일본 왕의 생일인 1932년 4월 29일 기념식을 거행할 때 폭탄을 투척하여 상해파견 군사령관인 시리카와를 즉사시켰다. 13년이 지난 뒤 1945년 11월 5일 김구 선생은 중경에서 돌아와 처음으로 홍구공원을 찾았다.

홍구공원은 지금 노신공원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중국인들은 홍구공원이라는 것을 거의 모르고 노신공원으로만 알고 있다. 중국 근대화의 대표적인 인물로 추앙받고 있는 노신(魯迅)을 위해 만든 곳인데 노신의 동상과 묘가 있으며, 묘비는 모택동의 친필로 적혀 있다.

한국인 관광객들이 많이 다닌 후로 윤봉길 의사의 기념공원인 매원(梅園)과 매헌(梅軒)이 있다. 원래 정자는 매정(梅亭)이라 불렀다. 봉길 의사의 호가 매헌이기 때문에 매헌정으로 바꾸어 주도록 요청했고 중국에서 정(亭)과 헌(軒)은 같은 뜻이기 때문에 매헌(梅軒)으로 바꾸고, 1층에 윤봉길 의사의 기념관이 들어섰다.

지금은 중국 노인들이 많이 찾는 곳이지만, 중국인들은 한국인 한 사람이 중국인 100만명과 같다는 생각을 갖게 하는 곳이다. 한국인들이 이곳에을 이 찾을수록 우리는 중국인들에게 자긍심(自矜心)을 갖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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