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전남여성운동사7>광주학생독립운동 참여한 꽃다운 소녀(2)
<광주전남여성운동사7>광주학생독립운동 참여한 꽃다운 소녀(2)
  • 김다이 기자
  • 승인 2012.07.18 17:5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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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부신 ‘소녀회’ 활동 펼친 박옥련

▲1928년 광주여고보 재학중인 정구부원 10명이 담당교사와 함께 기념촬영을 했다. 정구부원인 이들은 모두 박옥련(윗줄 오른쪽 두번째)씨와 입학동기로 소녀회 활동을 함께 했다.
광주에서 여성들이 사회운동에 참여하게 된 20세기 초. 일제강점기였던 1927년 5월 27일 조선여성의 대동단결을 꾀하고 항일여성운동을 펼친다는 목표아래 최초 여성운동단체 ‘근우회’가 조직됐다. 이 단체는 1929년 발생한 광주 학생독립운동의 지원 등 여성과 관련된 사회문제에 개입하기도 했다.

이처럼 항일투쟁에 대한 열기가 고조됨에 따라 광주에서도 1928년 광주여자고등보통학교 학생 장매성, 박옥련, 암성금자, 장경례, 박계남, 고순례 등이 주축이 되어 ‘소녀회’를 창립했다.

소녀회는 1929년 9월에 조직돼 광주학생독립운동까지 주요활약상을 펼쳤으며, 이들은 남학생들과 함께 비밀결사조직을 조직하고 여성운동의 길을 걷기 시작한다.

소녀의 몸으로 ‘항일투쟁’ 참여

▲故 박옥련씨
소녀회의 몸담았던 1914년생 박옥련씨. 그녀는 1927년 광주여고보(光州女高普/전남여고 전신)에 입학한 1회 출신이다. 당시 남녀 구별이 엄격하던 시절, 그녀의 아버지는 광주농업학교 1회 졸업생으로 개화된 성격을 지녀 ‘딸도 공부 잘하면 어디까지든지 가르치겠다’는 신념을 갖고 있었다고 한다.

그리하여 박 씨는 광주여고보에 입학하게 됐지만 당시 일본인 학생이 대부분인 대화(大和)여학교(현: 광주여고 터)에서 눈칫밥을 먹으며 더부살이를 해야 했다.

당시 광주여고보학생들은 모두 50명의 학생으로 1개 반 뿐인 터라 교실 한 칸을 빌어 수업을 받아야 했고, 운동장에서도 맘껏 뛰놀지 못했다.

한편 1928년에는 광주고보생들의 대 맹휴투쟁이 있었지만 여성의 몸으로 나서서 저항을 하기엔 보수적인 사회풍조와 부모님들의 지도단속 그리고 여학생이라는 나약함 등의 제약이 뒤따랐다. 하지만 항일정신이나 독립의욕마저 없던 것이 아니었다.

갖가지 멸시를 견디며 학교생활을 했던 박 씨는 리더십과 호소력도 강했던 장매성이 “독립정신을 고취시키는 조직을 만들자”라는 제의에 “그러자”라고 바로 답변을 하고 총 11명이 소녀회를 꾸려 항일투쟁에 몸을 던졌다.

해방의 열망이 뜨거웠던 박 씨는 광주학생독립운동의 ‘타오르는 횃불’의 증언집에서 “우리가 처음 모인 곳은 매성이의 집이었지. 이후에는 여러 명이 함께 드나들면 발각될 위험이 크므로 다음부터는 전남사범학교 뒤뜰 야외에서 보기로 했었어. 우리는 사람 눈에 띄지 않게 회합을 했었어”라고 회고한다.

▲처음 소녀회 회원들은 남학생들과 함께 장매성의 집을 비밀 회합의 장소로 이용했다. 사진은 광주 서구에 위치한 광주학생독립운동기념관에 전시물.
항일투쟁 나서 ‘진두지휘’

그러던 도중 1929년 11월 3일 ‘광주 학생독립운동’이 발생했다. 여리하고 나약하게만 보이는 여학생들이 무엇을 할 수 있었을까? 칠흑 같던 회오리 속에서 광주고보생들의 대시위 운동이 있던 그날 박 씨는 앞장서서 남학생들에게 물을 떠주고 붕대로 상처를 감싸주며 독립운동에 참여했다.

박씨는 “그 당시 일본 순경은 시위학생을 붙잡기 위해 등에는 분필로 동그라미를 표시했었다”면서 “나와 소녀회 조직원들은 물수건을 준비하여 시위학생들의 분필을 닦아주고 광주역 앞, 공원 앞 등에 모여 항일 투쟁 현장을 뒤따랐다”고 한다.

결국 대규모 검거선풍과 함께 박 씨는 12월 말 새벽에 일본인 형사에게 잡혀갔다. 이듬해 10월 6일에는 광주지법에서 징역 1년, 집행유예 5년을 선고받게 됐다.

옥중생활을 떠올리며 박 씨는 “결코 나는 장한 일을 한 것이 아니다. 미결기간 동안 옥중생활은 후일 내게 큰 교훈이 됐으나 그때의 고통은 이루 말할 수 가 없다”면서 “그것은 장한 일이기에 앞서 일제강점기로 인해 나라를 잃은 민족의 불행이었다”고 증언했다.

이렇듯 광주학생독립운동에 앞장서서 항일투쟁을 펼쳤던 여성애국지사였던 박옥련씨는 나라에서 공훈을 기려 1983년 대통령 표창,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 수여하게 됐다. 그리고 초창기 여성운동가의 진면목을 보여줬던 박 씨는 지난 2004년 11월 21일 90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하게 됐다./김다이 기자 

▲광주학생독립운동 당시 소녀회의 사진. 1929년 11월 3일 독립운동 시위에 참가한 여학생 7명이 시위가 끝나고 사직공원에서 잠시 숨을 돌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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