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양방죽 태봉산 복원 나서자 1
경양방죽 태봉산 복원 나서자 1
  • 정건재 전남과학대학교 교수(동양사회사전공)
  • 승인 2012.07.16 17: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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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정권 시절의 광주경양지와 경주보문호

1968년 광주시 계림동에 자리 잡고 있던 광주의 생명수, 광주의 젖줄이던 경양지, 조선 세종 이후 반 천 년(527년간)동안 한 민족, 한 지방의 상징적 역사 문화유산이었던 경양지와 태봉산을 불과 반세기 앞도 내다보지 못한 어리석은 후손들이 영원히 땅속에 파묻어 버렸다.

이것은 대한민국의 역사에 오점을 남겼을 뿐 아니라, 조상들한테 씻을 수 없는 과오를 범한 것이다. 지난 시절 경양지와 태봉산이 일제 강점기 조선 총독부와 한국의 박정희 정권에 의한 정치적 희생양으로 사라진 것은 어찌 보면 국가의 운명과 함께 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반면에 박 정권 하에서 경주 보문관광단지는 전체 면적이 321만평으로, 1971년 8월 경주관광개발계획 확정, 1974년 1월 IBRD차관 협정기금으로 개발하기 시작, 2001년 완공된 초대형 국책사업이었다. 그리고 보문단지는 전 지역이 온천지구 및 관광특구로 지정 되어있는 국제적인 종합 휴양지로서 특히 50만평 규모의 보문호수는 인공호수로 주위에는 국제적 규모의 호텔과 각종 위락시설과 공원시설이 잘 갖춰져 있다.

우리는 위 두 가지 너무나도 대비되는 사실에 경악을 금치 못 한다. 이것은 같은 시대 즉, 1970년대 불과 200km도 떨어지지 않은 대한민국 광주와 경주에서 발생했던 사실로 우리나라 이야기인지, 아니면 딴 나라 이야기인지 통 구분이 안 된다.

이같은 사실은 특정지역에 대한 차별정책이나 탄압 정책으로 치부될 수 있는 차원이 아니라, 바로 우리 내부에서 저질러진 역사왜곡의 현장으로 지난 반세기 동안의 한국사회의 자화상이 동영상처럼 머리를 스치고 지나가게 한다.

알아듣기 쉽게 설명하자면, 반천년 동안 세종대왕의 백성사랑의 큰 뜻과 함께 했었고, 다산 정약용이 찬미했던 역사 유적지로 일제강점기에도 버텨냈던 광주 경양지(1만6000평)는 없애버렸고, 정반대로 경주보문관광단지(전체 321만평)내 보문호(인공호수 50만평), 신라민속촌 5만평 등은 중앙정부 차원의 개발 정책에 의한 추진은 물론, 외국 차관을 들여와서라도 없는 호수를 인공적으로 만들어 냈다는 것이다.

이런 사실은 박정희 정권에 의한 배타적 지역집단주의에 입각한 호남이라는 특정지역을 장기간에 걸쳐 차별하고 탄압했던 정책의 결과로 밖에 볼 수 없는 역사적 사실로 영원히 남을 것이다.

따라서 지금 광주 지역을 비롯한 대한민국 사회는 이와 같은 역사적 사실로부터 교훈을 얻어, 후세에 다시는 이런 후안무치한 어리석음이 반복되지 않도록 해야 할 시대적 사명을 결코 외면해서는 안 될 것이다.

광주광역시의 경양지와 태봉산 복원사업은 광주라는 한 지역에 국한된 역사가 아니라, 대한민국의 세종대왕의 위대한 업적을 되살리는 원래 모습을 되찾는 역사적 차원에서 논의가 시작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1.광주 경양지
○광주 경양지의 옛 모습과 현재 모습
∇해동여지도 광주 경양일대와 국사편찬위원회 한국근대지도자료 광주 북부 지역

∇1946,47년 무렵 경양지


(자료: 광주1백년사 기념사진전, 광주광역시)

원래 경양지는 조선 세종대왕의 중농정책에 따라 1440년, 광주인 김방이란 분이 연인원 약 53만 명과 농우, 제주도 조랑말까지 동원하여 3년여에 걸친 대역사 끝에 만든 인공 호수였다.

당초 면적은 총면적 6만5천 평(호수면 4만6000평)에 달하였고, 광주 서북부 지역 평야지대에 안정된 농업용수를 제공하여 가뭄을 막아냈고, 매년 광주천에 홍수가 질 때면 물을 가두어서 하류지역의 홍수 피해를 막아주었던 그야말로 500여 년이라는 반 천년의 긴 세월동안 대대로 광주 지역과 생사고락을 함께한 광주의 생명수와 젖줄이었던 것이다.

경양지 주변에 설치했던 경양역은 광주로부터 담양, 장성, 화순으로 통하는 교통․통신의 중심지였던 곳이다. 제방과 둑에는 수령 2-3백년 된 팽나무, 귀목나무, 왕버드나무가 어우러진 거목들의 숲을 이루고 있었던 광주의 아름다운 명소였던 곳이다.

경양지는 조선의 가장 주요한 생산 산업인 농업에 크게 기여했으며, 나라와 백성을 잘 살게 했던 전천후 사업이었다. 또 경양지는 그 규모나 설계에 있어서도 과학적이고 합리적이었으며, 호수 수면면적 4만6000평, 깊이 10m 이상, 4km의 수로를 옛날 한국식 콘크리트 공사방식으로 백회와 황토로 시공해 물이 새지 않도록 방수 장치까지 갖춘 인공 호수였다.

그 후부터는 가뭄이 계속되어 기근이 들어도 광주평야는 기름진 옥토로 변하고, 해마다 풍년가의 노랫소리가 곳곳에서 들리어 백성들의 생활은 날로 윤택하게 되었다고 한다. 조선시대 축조된 경양방죽은 현대적 의미의 농업용 관개배수시설에 가까웠던 셈이다.

([아시아경제]http://www.asiae.co.kr/)

또 경양지는 다산 정약용 선생이 ‘과경양지過景陽池’라는 유명한 시를 남길 정도로 경관이 뛰어난 역사적 문화공간이었다. 정약용 선생이 16세 되던 해, 그의 부친이 화순 현감으로 부임할 때, 경양지를 지나면서 남긴 것으로 보인다.

過景陽池 경양지를 지나며
雜樹臨官道 잡목은 큰길가에 늘어섰는데
芳池近驛樓 역루의 가까운 곳 저수지 하나
照顔春水遠 얼국 비친 봄물은 아득히 멀고
隨意晩雲浮 저문 구름 두둥실 한가롭기만
竹密妨行馬 대밭 성해 말 몰기 여의치 않고
花開合汎舟 연꽃 피어 뱃놀이 제격이로세
弘哉灌漑力 위대할사 저수지 관개의 공력
千畝得油油 일천이랑 논물이 넘치네
《나는호남인이로소이다》388-99쪽 이종범편. 사회문화원. 2002.

그러나 경양지의 운명이 순탄한 것만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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