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전남여성운동사3>광주의 어머니, 소심당(素心堂) 조아라(2)
<광주전남여성운동사3>광주의 어머니, 소심당(素心堂) 조아라(2)
  • 김다이 기자
  • 승인 2012.06.19 10:3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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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직후 'YWCA' 본격적 여성운동

드디어 민족 모두가 염원했던 일제강점기로부터 해방이 되었다. 조아라 선생은 스승인 김필례 선생님의 영향을 받아 YWCA에서 본격적인 여성운동을 시작했다.

광주의 여성 지도자였던 김필례, 김정현, 현덕신 등과 함께 건국준비위원회 광주부인회를 출범시키고, 일제에 의해 맥이 끊긴 광주 YWCA재건을 통해 여성운동의 얼을 되찾고자 노력했다. 그것은 교육이 중요하다는 생각이었다.

6.25로 ‘분단의 아픔’을 겪어

그녀는 1937년 신사참배 거부로 폐교당한 수피아여학교 재건에 나섰다. 광주·목포·순천을 돌아다니며 모교 재건 기금을 모았다. 마침내 1945년 12월 5일 양림교회에서 수피아여학교를 부활시켰다.

하지만 꿈에 그리던 광복의 기쁨도 잠시였다. 6.25 한국전쟁으로 38도선을 경계로 두 개의 국가가 세워지면서 민족의 아픔은 더 커졌다. 한반도는 한국전쟁으로 인해 수많은 인명피해가 발생하고, 경제적 피해로 배고픔과 전쟁후유증에 진통을 겪게 된다.

6.25 당시 피난 온 피난민들의 처지는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이들의 몸에서는 이가 득실거려 우선 옷을 빨아 입히는 것이 급선무였고, 조아라 선생과 YWCA는 환자를 병원으로 옮겨주고 이발도 해주었다.

조아라 선생의 회고록에는 “나는 그 일을 우리가 하지 않으면 누가 하겠느냐는 생각이 들어 광주천으로 나가 빨래를 시작했다. 물속에 담군 옷에서 떨어져 나온 이가 떠내려가는 광경이 마치 깨를 몇 말이나 풀어 놓은 것 같았다. 하지만 깨끗한 옷을 입게 된 수용소 사람들은 감사의 눈물을 흘렸다”고 당시 상황을 술회했다.

'광주의 대모' YWCA 활약상

전쟁이 끝난 후 그녀는 “나라를 다시 세우는 데 여성들의 힘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YWCA에서 헌신과 열정을 쏟았다.

또한 조 선생은 전남도청의 부녀계장을 겸임했다. 전쟁 이후 생계가 막연해진 미망인과 전쟁고아들을 보살피기 위해 1952년 YWCA 복지사업기관으로 성빈여사를 건립했다. 이곳에서 그녀는 갓난아이와 고아들의 어머니가 되어주고 헐벗고 버림받은 이들의 어머니가 되어주었다.

성빈여사는 육아원이라는 이미지와 동시에 여학사라는 특성에 중점을 두고, 아이들의 자부심과 긍지를 살려주기 위해 교육에 심혈을 기울였다.

'조아라 장로 희수기념문집'에서 그녀는 “당시만 해도 가정이나 사회가 모두 남성 우월주의였고, 여성은 단지 남성의 보조자로 살았기 때문에 가장인 남자가 사망하면 어머니는 자녀에 대한 친권 행사조차 할 수 없었다”고 회고하여 여성 평등권을 위해 힘써온 것을 알 수 있었다.

또한 그녀는 "미망인과 전쟁고아들을 먹고 업고 키워주는 것만으로 성숙한다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았다.

▲목조 건물로 된 최초 성빈여사의 모습. 1955년 성빈여사 마당에 텐트치고 공부하던 호남여숙 학생들이 술래잡이를 하고 있다.
▲조아라 선생이 윤락여성들을 대상으로 직업훈련을 시키기 위해 1962년 설립한 계명여사. 현재는 가정폭력피해자보호시설로 운영되고 있다.

소외받은 여성 위해 교육 선도

조 선생은 그러한 이유로 성빈여사에 들어와 함께 사는 아이들과 영세민 자녀들이 중학과정을 받을 수 있도록 1952년 호남여숙(야간중학)을 설립하고 ‘광주의 어머니’다운 헌신적인 사랑과 애정을 보였다.

소외받고 사회의 어두운 그늘 속에 버려진 윤락여성을 위한 교육의 애착도 남달랐다. 1962년 계명여사를 설립하여 여성도 손쉽게 기술을 배우게 하고 전문 여성인력들을 배출했다. 또한 어려운 여학생들을 위해 청소년 야학인 별빛학원을 설립하여 동거동락을 하며 여성교육을 선도했다.

한편 지난 1959년 대한YWCA 총무로 활동하다 조 선생을 알게 된 이희호 여사는 “조아라 장로님은 언제든지 소외되고 가난하며 멸시천대를 받는 여성들을 찾아 손을 잡아주는 분이었다”면서 “헐벗고 굶주리는 이웃, 외롭고 아파하는 이웃을 찾아서 돌봐주는 일에 손을 떼지 않았다”고 말한다.

이렇듯 몸을 아끼지 않고 YWCA에서 여성과 어린이의 권리를 되찾아주는데 누구보다 앞장섰던 그녀는 광주의 대모라는 말을 자연스럽게 듣기 시작했다./김다이 기자

▲조아라 회장님이 지난 2003년 91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하기 직전까지 동거동락했던 주택. 현재 YWCA 지역아동복지센터로 운영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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