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전남여성운동사2>광주의 어머니, 소심당(素心堂) 조아라(1)
<광주전남여성운동사2>광주의 어머니, 소심당(素心堂) 조아라(1)
  • 김다이 기자
  • 승인 2012.06.13 16:51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백청단 사건의 주역 '여장부'

▲역사를 품에 안으셨던 故 조아라 선생의 생전 모습.
20세기 초 일제강점기의 시대는 모두에게 슬픔이었다. 하지만 당시의 수난에도 불구하고 18세 꽃다운 나이에 독립운동을 펼치며 민주여성인권운동에 앞섰던 뜨거운 가슴을 가진 여인이 있다.

그의 이름은 바로 소심당(素心堂) 조아라. 여성운동사에 큰 획을 긋고 민주인권운동에 평생을 바쳤던 그녀는 YWCA 활동을 통해 나라를 사랑하고 가난한 자들을 보살폈다.

어린 시절 남다른 계몽의식

그녀는 1912년 전남 나주출생으로 3남 3녀 중 둘째 딸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 아버지 조형율 장로가 사재를 털어 교회와 사설학교를 세웠다. 그러한 환경 속에서 자라 계몽의식 또한 남달랐다.

그녀는 다섯살 무렵 남들이 노리개를 가지고 놀 때 조선어 책을 갖고 놀만큼 국문을 이해했다. 여섯 살 때 성경과 관련하여 100문답이 들어있는 ‘초등 문답책’ 내용을 다 외우고, 여덟 살 때는 성인용 100문답 책을 줄줄 암기할 만큼 뛰어난 암기력을 가졌다.

▲결혼 당시의 가족. 오른쪽이 조아라 선생, 앞에 시어머니(김용순)가 앉고 가운데 남편(이택규), 왼쪽이 시동생(이재규)
그녀는 1927년 광주 수피아여학교에 입학했다. 아버지인 조 장로가 그녀의 영특함을 놔둘 수 없어 광주까지 유학(?)을 보내게 되었다. 나주에서 광주까지 날마다 완행기차로 통학을 하는 고달픔보다는 공부할 수 있다는 것이 큰 기쁨이었다.

더욱이 수피아여학교를 다니며 여성교육과 인재양성에 헌신한 김필례 선생을 만나게 된 것이 인생의 전환점을 가져오게 된다. 그것은 이후에 YWCA활동에 평생을 헌신하게 된 계기가 된 것이다.

그녀는 1931년 졸업과 동시에 외국인 선교사 서서평 여사가 운영하던 이일학교 교사로 일을 했다. 이무렵 그녀의 가족들은 광주로 이사를 왔다. 조금은 생활이 나아졌지만 그녀의 인생은 평탄하지만은 않았다.

이일학교에는 학령이 초과하여 학교를 가지 못한 사람 또는 과부나 이혼녀들이 다니는 곳이었다. 조 선생의 깨어있는 여성운동 의식과 딱 맞는 곳이었다. 이곳은 수피아를 졸업한 우수한 졸업생 중 한두 명만 이일학교의 교사로 재직을 할 수 있었다.

수피아 ‘백청단’ 사건 발각

1933년 1월 그녀가 교사로 일하기 시작한 지 1년 10개월이 되던 날 일은 터졌다. 그녀의 동지 중 한 명이 가택수색을 당하던 중에 일기장에서 1929년 11월 재학 때 광주학생운동에 참여했던 비밀결사 조직 ‘백청단’ 사건이 뒤늦게 밝혀졌기 때문이다.

‘백청단’은 수피아여학교의 재학생 10여 명이 학교 지하실에 모여 조직한 학생독립운동 비밀결사였다. 당시 ‘백청단’에 함께 참여했던 그녀가 그 주동자로 지목된 것이다. 이 사건으로 그녀는 연행되어 조사를 받고 1개월 후 석방은 됐지만 교직을 박탈당하고, 요시찰 인물로 낙인찍히게 됐다.

그녀에게 있어서 끔찍했던 일제 침탈과 참혹한 만행이 고조에 이르렀을 당시는 끝없는 투쟁의 삶이었다. 이후 독립의지를 갖고 청년회 활동을 함께 하며 서로 알게 된 인연인 이택규씨를 만나 1935년 결혼식을 올리게 된다. 그리하여 그들 사이에서 학인(장남)이 태어나고 행복한 시간을 맞게 된다.

하지만 그런 행복도 잠시였을 뿐 그녀에게는 다시 역사적 소용돌이가 파도처럼 덮쳐 왔다.

일본은 1936년 끝없는 식민정책 강화로 창씨개명, 신사참배와 동방요배 등을 강요하고, 그녀의 모교 수피아는 1937년 신사참배 거부로 자진 폐교 선언을 했다. 하지만 또 다시 김필례 선생님과 동창회장인 그녀도 학인(장남)을 업고서 한 달간 옥살이를 하게 됐다.

끝없는 '투쟁의 삶'의 반복

그러한 일제의 압박 속에서도 조 선생은 아랑곳 않고 신념을 굽히지 않는 여장부였다. 그녀의 명쾌한 논리와 쩌렁쩌렁한 연설 소리는 주변 사람에게 사기를 북돋아줬다.

이후 석방되고 나서 남편을 따라 평양신학교를 다니게 됐다. 일제의 억압과 침탈은 어디에서도 똑같았다. 평양에서 다니던 교회는 어쩔수 없이 일제의 신사참배를 받아들이기로 결의하자 조 선생 부부는 더 이상 머무를 수 없었다.

신사참배 거부와 함께 광주로 내려오기로 결심했다. 조 선생의 남편 이택규씨는 이러한 와중에 건강이 악화되어 26세의 젊은 나이에 그녀 곁을 떠나게 된다. 조 선생의 슬픔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조 선생은 다음해 태어나자마자 유복자가 된 둘째 학송을 낳고 학인(장남)을 데리고 여장부로써 힘겨운 생활을 헤쳐 나간다. 하지만 그녀는 남편을 여윈 아픔이 채 가시기도 전에 일경들은 또 다시 밖을 에워싸고 어린 아들 둘을 두고 이유 없이 끌려가게 됐다.

이렇듯 1945년 8월 15일 민족 모두가 염원했던 해방이 되는 그날까지 조 선생은 매번 일경들에게 조사를 받거나 체포되어 가시밭길을 걸어야 했다. /김다이 기자

▲조아라 선생 젊은 시절 모습.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