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고풍 물결의 치유와 매혹
복고풍 물결의 치유와 매혹
  • 유지나 동국대 교수(영화평론가)
  • 승인 2012.05.29 21:4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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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모두 누군가의 첫사랑이었다.” 첫사랑을 복고풍에 담아낸 <건축학개론>이 포스터에 내건 문구이다. <8월의 크리스마스> 이후 나온 부드러운 남성멜로드라마 <건축학개론>은 첫사랑 판타지를 불러일으키며 장기 흥행 성공을 거두었다.

영화를 보고난 관객들이 자신의 첫사랑을 추억하는 모습이 종종 눈에 뜨이기도 한다. 남자 역시 아름답고 부드러운 사랑을 꿈꾼다는 공감대가 전달되는 점도 성공적으로 보인다.

첫사랑의 기억, 우울한 현재와 삶을 치유하는 힘


‘첫사랑’이란 개념은 마지막 사랑뿐 아니라 여러 번의 사랑을 전제로 성립되는 개념이기도 하다. 그런데 처음이기에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어떻게 풀어내야 할지 혼돈스럽고 서툴고 … 그래서 첫사랑은 지나간 과거의 앙금이다.

그 앙금은 사람에 따라 인생의 시기에 따라, 그리움일 수도 있고 고통일 수도 있고, 각양각색 기억으로 재구성될 것이다. 특히 현재가 우울할 때, 과거 기억으로 격정적인 열기가 지배하던 첫사랑은 자연스럽게 복고풍 정서를 끌어들인다.

앞으로 무얼 할지? 어떤 이와 인생을 함께 할지? 불투명한 앞날을 내다보며 방황하던 청춘. 그 시절 벌어진 첫사랑은 시간이 흐른 후 과거 향수를 담보한 사건으로 의식과 무의식 차원에 저장될 것이다. 이후 세월이 흘러 자신의 인생길이 보다 구체적으로 가늠되지만, 팍팍하게 다가올 때, 사회적 역할로부터 자유로운 탈주조차 불가능한 기성인이 돼버린 우울함에 사로잡힐 때, 첫사랑의 기억은 현재를 재구성하는 기억의 힘을 보여준다.

“많은 날이 지나고 나의 마음 지쳐갈 때/ 내 마음속으로 쓰러져가는 너의 기억이 다시 찾아와/ 생각이 나겠지” 라고 노래하는 ‘기억의 습작’(전람회)은 첫사랑의 기억과 현재를 오가며 드라마를 짜나가는 영화와 절묘하게 맞아 떨어진다.

건축학개론 수업에서의 만남, 그러나 제대로 고백되고 풀리지 못한 첫사랑. 15년 후 재회는 우연이 아니다. 여자가 첫사랑을 찾아내 집짓기를 의뢰했으니까. 죽음을 앞에 둔 아버지 돌보기에 나선 여자는 제주도 집을 개조하는 건축가로 그를 고용한다. 여자는 이혼 후 독신이 되었고, 남자는 결혼을 앞두고 있다. 오해 속에 소멸된 첫사랑은 집짓기를 통해 인생짓기처럼 다른 관계의 미학으로 복원된다. 사랑의 종착역이 반드시 결혼일 필요는 없으니까.

굳이 첫사랑 앙금거두기만 인생 복원 치유력을 발휘하는 것은 아니다. 과거 기억을 재구성하는 복고 정서는 우울하고 불안한 현재, 각박한 삶을 치유하는 힘을 발휘한다. 근대성을 연구한 리타 펠스키의 진단처럼, 복고풍의 욕망은 과거 억압적 차원을 얼버무리기도 하지만 타락한 현재를 비판하고 대안적 미래를 건설하려는 욕망을 보여주기도 한다.

현재를 비판하고 대안적 미래를 건설하려는 욕망

이를테면 과거 십대의 활기를 중년에 들어서 복원하는 여자들의 제2의 인생을 그린 <써니>, 상당부분 그 영향력이 느껴지는 <댄싱퀸>, <범죄와의 전쟁>같은 영화들은 가까운 과거를 복고풍 물결 속에서 길어 올린다. 올해 하반기 개봉할 <미운 오리새끼>도 동시대적 복고열풍을 증명해준다. 영화뿐만 아니라 대중음악이나 일반적 문화현상으로 복고풍이 하나의 물결을 형성하며 몰아치는 것은 현재의 불안과 우울을 다루는 방식이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복고풍 속에 재구성된 기억의 드라마는 상상된 과거에만 머물지 않는다. 그것은 막막한 현재에 대한 성찰이자 미래에 대한 재구성이기도 하다. 과거보다 현재가, 현재보다 미래가 나아질 것이라는 발전적 진보관은 경제와 환경적 측면에서 이미 허물어지고 있다. 그런데 유독 정치만 나아질 것이란 진보적 기대는 이제 재점검을 당하고 있다.

“우리는 모두 누군가의 첫사랑이었다”라는 문구가 주술처럼 영감을 준다. 그런 첫사랑이 복고풍의 흐름을 타고 두 번째 사랑, 세 번째 사랑, 끊임없는 사랑으로 가지 치며 삶의 의지를 복원시키는 것. 그런 일이 문화·정치적으로 일어나는 것이 우울한 현재를 견뎌나가는 위안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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