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 저들의 만행과 아픈 기억(2회)
1980년, 저들의 만행과 아픈 기억(2회)
  • 문승훈 광주전남민주화운동동지회 공동대표
  • 승인 2012.05.16 16:0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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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광주민중항쟁 발발과 150여일의 도피, 그리고 검거

▲ 광주여대 강사, 광주전남민주화운동동지회 공동대표
1980년 5월 18일 계엄당국은 전국에 비상계엄을 확대 실시했다. 17일 늦은 저녁부터 그들은 그동안 파악해 놓은 각 대학 총학생회 및 복적생 중에서 소위 극렬주동세력을 예비검속하기 시작했다.

5월 17일 저녁에 나는 월산동 친구 집에 의지해 있었다. 뭐라고 말할 수 없는 음산한 낌새가 이상해서 집에 가지도 못하고 친구와 같이 술을 먹으면서 불확실한 내일을 걱정했다.

먼저 일어난 친구가 큰일 났다고 한다. 결국은 터졌군. 다시 집에 못 가겠군. 참담했다. 

친구와 나는 녹두서점에 가 보려고 했다. 그러나 우리는 서점에는 가지도 못하고 유동3거리와 금남로에서 계엄군 만행을 보면서 부들부들 떨어야만 했다.

총학생회 55-1622(농담으로 ‘전화번호 왜 이래 5·16이 2번이야’라고 한 기억이 있음)와 녹두서점(당시는 기억했는데 현재는 생각이 안 남)과의 연결도 되지 않았다. 가톨릭센터 근처 골목에서 숨죽이고 본 그 살벌한 광경들이 너무도 생생하다.

20여명 이상의 내 또래 애들의 처참한 몰골과 팬츠와 브래지어만 걸치고 난타당하는 그리고 어디론가 실려 가는 사람들의 모습은 지금도 5월이면 어김없이 나타나 나를 괴롭히고 있다.

친구는 강진으로 간다고 했다. 결국 그 친구와 19일에 이별하고 화정동 사촌형님 집으로 긴급 대피했다. 집에는 계속 연락하지 않고서... 결국 1980년 나는 5월 18일부터 예비검속 대상자로 지명수배되어 계속 도피할 수밖에 없었다.

2007년 5월 12일, <시민의 소리>에서는 공개된 수배자 명단과 사진을 아래와 같이 보도했다.

“(중략)수배자 명단은 A4 크기보다 세로길이가 더 긴 미색 종이에 3장 1세트가 온전한 상태로 보관된 채 전달됐다. 벽보에 부착된 것을 뜯어낸 흔적도 없고 일선 경찰서에 검거를 위해 지급된 내부 회람용을 누군가 처음 상태로 외부로 흘려보내 지금껏 보관돼 온 것으로 보인다. 결국 수배자 명단은 광주항쟁 이후 벌어질 이후 파장을 우려해 계엄사령부가 학생운동 전력이 있는 이들과 언론사 기자, 민주화 인사들 즉 제2의 광주항쟁에 대한 방비책으로 대대적인 검거에 나선 것으로 볼 수 있다. 수도권 수배자들 중 광주-전남 출신이 많은 것도 이러한 설명을 뒷받침한다.(중략)” 

어쨌든 나는 월산동 친구 집에서 화정동 사촌 형님 집으로, 죄송스럽지만 솔직히 무서워서, 5월 23일경에는 김제 이모집으로 도망쳤다. 나중에 계엄군의 구 전남도청에서의 학살 소식을 전해 듣고서는 서울 친구 집으로 가게 되었다.

5월 항쟁 기간 동안에 나는 집에 소식을 전할 길이 없어 내 생사를 알 수 없었던 어머니와 외숙모 식구들은 나를 찾으러 도청 및 금남로를 헤매셨다. 이때 외사촌 조카인 고3 최은홍은 나를 찾으러 나왔다가 5월 23일 오후(시간 미상)에 구 전남도청 앞에서 계엄군의 총에 맞아 약 1년 동안 기독병원에 입원하였고, 그 후유증으로 4년 전에 사망하였다.

이렇게 조카는 죽고 나는 살아남아 현재까지도 그 빚을 갚지 못하고 있다. 외숙모를 가끔 '5월 어머니집' 행사에서 뵌다. 조카 장례식 때의 그 피끓는 절규를 잊을 수 없다. 살아남은 자의 부채 의식이 항상 나를 괴롭힌다. 그래서 5월만 되면 우리는 미치는 모양이다.

친구인 박몽구는 가끔 나에게 내 어머니 자랑을 하곤 한다. 5월 27일 이후 도피할 때 내 어머니와 김상집의 어머니께서 함께 동행하여 기차 철로길을 따라 송정리까지 걸어서 자신을 배웅해 주었다고 고마워한다. 지금 내 어머니는 살아계신다. 어머니에게 나는 평생 불효만 했다.

이처럼 내가 친척과 친구의 비밀스럽고 위험한 도움으로 계속 도피하고 있을 때 1980. 7.29일자로 광주서부경찰서는 전남북계엄분소장에게 그동안의 나에 대한 수사를 아래처럼 보고한다.

제목 : 수사보고

1. 인적사항(중략)
2. 수사내용
가. 주거지 및 가족 상대 수사
(중략) 매복근무에 당하였으나 출입사실 발견치 아니하여 본명가에 급습하였으나 소재 발견되지 아니하여 수회에 걸쳐 집에 출입하며 동정을 살피는 한편 가족 전원을 개별적으로 상대하여 가며 자수 공작을 하여오는 일방
나. 연고선 수사 (1) 영광 거주 숙부(중략), (2) 공무원 6촌 형(중략), (3) 영광 거주 외삼촌(중략), (4) 화순 거주 사촌 누나 등 (중략) 망원을 통하여 소재 파악하는 일방 연고선 등을 계속 수사 중에 있음. 끝.

이렇게 저네들은 내 주거지와 가족, 친척을 상대로 온갖 자수공작 등을 하면서 회유하고 그렇지 않으면 가족에게 피해가 올 거라고 괴롭히면서 연고선에 대해서도 계속 수사하였다. 그리하여 형사들은 수시로 집에 들락거리면서 가족들에게 나를 자수시켜주거나 숨은 곳을 알려주면 돈을 주겠다고 꼭 자기에게 말해주라면서 어린 동생들한테는 용돈도 주고 아버지에게는 약주도 대접했다고 한다.

1계급 특진이 탐나 인간성마저 파괴시킨 나쁜 놈들..... 정말 쌍놈들이다. 친척들은 어머니를 멀리 하였다. 어머니는 그것이 못내 서운했다고 하셨다.

1심 재판을 앞두고서 1980년 8월 1일자로 전남합동수사단은 전남대 5월 항쟁 관련자 32명 을 검거자와 미검거자로 구분하여 내란, 포고령위반으로 전남북 계엄보통군법회의에 사건을 송치하였다.

이때의 사건송치서 별첨에 의하면 전남합동수사단은 나를 포함하여 총 32명을, 구속별(날짜순서)로 예비검속(정동년, 김상윤, 박선정, 윤목현), 검거자(이승용, 권향년, 김태진, 김병학,박동만, 위경종, 차상섭, 정용화), 자수자(11명, 성명 생략), 미검거자(박관현, 윤한봉, 송선태, 박몽구, 문승훈, 노준현, 최용주, 김영휴, 이성길)로 구분하여 전남북 계엄보통군법회의로 사건을 송치하였으며, 보통군법회의는 나를 포함하여 미검거자 9명은 내란, 포고령위반으로 기소중지하여 계속 수배하였다. 이에 뒤질세라 전남대당국은 구속되었거나 수배된 5월 항쟁 관련자를 1980년 8월 11일자로 제적시켰다.

또한 사건송치서에는 미검거 상태인 박관현 총학생회장을 피고인(피의자)으로 한 ‘압수물건 총목록’이 아래와 같은 형식으로 기록되어 있다. 아주 중요한 자료들이다. 이를 되찾기 위한 운동을 5·18관련단체가 연합하여 추진해주기를 간절히 호소한다.

압수물건총목록
1980. 압제(글자 불분명) 호
피고인(피의자) 朴寬賢
(참고 : 1번부터 300번까지 총 물건 300건 중 몇 개만 옮깁니다.)

물건번호

물건

수량

압수목

록정수

소지자 또는 제출자 주거 성명

소유자 주거 성명

비고

1

양심선언문

(김상진)

1

822

전남대 학생처

장학담당관

전남대 법대

3년 박관현

첨부

65

어용교수백서

1

822

전남대 학생처

장학담당관

전남대 법대

3년 박관현

첨부

102

성균관대학교

공청회안내서

1

1501

전남대 학생처

장학담당관

전대 인사대 4년

한상석

첨부

169

총학생회칙

1

1874

전남대 학생처

장학담당관

전대공대 3년 이승룡

첨부

247

프랑카드

2

3132

전남대 학생처

장학담당관

전대 자연대 3년

윤목현

첨부

263

피켓(유신잔당 사그리 사라져라)

2

3335

전남대 학생처

장학담당관

전대공대 3년 최영준

첨부

291

투쟁은 결코 끝나지 않았다.

2

2265

전대 공대 4년

차명석

전대공대 4년 차명석

첨부

300

해당교수님께

1

2265

전대 공대 4년

차명석

전대공대 4년 차명석

첨부


도피는 차라리 구금되어 있는 것보다 더 많은 정신적 고통과 불안을 안겨주었다. 대학생 시늉하고 직장인 선배에게 용돈 얻어 쓰고 일반인 행세하는 것도 무서웠다. 거리에 붙어있는 1계급 특진과 포상금액 미상의 수배사진을 보는 고통을 누가 이해하겠는가! 

1980년 5월 18일부터의 피눈물나는 도피생활 과정에서 내 심신은 극도의 공황 상태에 빠지게 되어 차라리 잡히더라도 광주에서 잡히자고 결심하고 날짜 미상에 다시 광주로 오게 되었다. 돈도 없었고 친구에게도 더 이상 신세지기 미안해서 집으로 비밀리에 연락하여 어머니가 마련해준 광주 지산동에서 자취하게 되었다.

그러나 나는 극도의 불안과 공황을 벗어나지 못하다가 1980년 10월 17일 전후(날짜 미상) 저녁(시간 미상)에 광주서부경찰서 형사에게 검거되었다. 검거되니까 차라리 마음은 편했다.

그 후 나는 광주서부경찰서, 505보안대를 거쳐 상무대 영창에 구금되었다. 내가 검거된 직후 광주서부경찰서는 나머지 미검거 수배자를 체포하기 위해 수일 간 취조와 고문을 계속하다가 10월 후반(날짜미상, 2심 재판이 진행 중인 때) 505보안대로 이첩했다.

1980년10월 30일부터 전남합수단은 나를 본격적으로 최소 5차례 이상(횟수 미상) 심문하였다. 이때 나는 검거될 때 압수된 상황일지로 인해 집요하게 취조당했다.(상황일지에 관해서는 1회 글 참조)

5월항쟁으로 돌아가신 분이 많으신 데, 고문이야 기본과정인 데, 이렇게 살아남아 글을 쓰는 것 자체가 5월 영령님들께 죄송스럽다. 5월 영령이시여, 편히 잠드소서.
(3회는 ‘5·18광주민중항쟁 1심, 2심, 재심 그리고 현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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