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 저들의 만행과 아픈 기억(1회)
1980년, 저들의 만행과 아픈 기억(1회)
  • 시민의소리
  • 승인 2012.05.10 1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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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광주민중항쟁 전야와 상황일지

▲ 문승훈(광주여대 강사/광주전남민주화운동동지회 공동대표)
나는 1978년 전남대 사대 국사교육과 2학년에 재학 중 1978년 6월 29일 전남대 민주교육지표 사건에 연루되어 구속·제적되었다. 이후 나는 1980년 3월에 전남대에 복적하였으나, 다시 5·18민주화운동에 참여하였다라는 혐의로 전교사계엄보통군법회의(사건번호 : 80계엄보군형공 제230호)에서 내란부화수행, 계엄법위반으로 징역 2년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고 광주고등법원(사건번호: 81노 167호)에서 1982년 12월 16일에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아 이 형이 확정되었다.

그 후 나는 5·18광주민중항쟁 재심에 관한 것을 전혀 모르고 지내다가, 무려 31년이 지난 2011년 4월 4일에야 광주고등법원에 재심을 신청하여(사건번호 2011재노3 내란부화수행, 계엄법위반) 무죄의 판결을 요구하게 되었다. 그 결과 2012년 2월 14일 무죄로 판결받고, 22일에 무죄로 확정되었다.

재심 과정에서 5월 항쟁과 관련된 나의 재판관련서류 일체를 32년 만에 처음으로 볼 수 있었다. 그것은 A4용지로 무려 650쪽에 달하는 방대한 것이었다.

이는 나의 1,2심 재판 관련서류일체(A4 30쪽 분량의 일명 자유노트로 검거시 압수된 당시 전남대의 학생운동 상황일지, 수사 보고서, 자술서, 신문서, 구속집행확인서, 공판조서 및 판결문, 증인신문조서 등)와 고 박관현 총학생회장과 한상석의 참고인 진술조서, 공판조서, 피의자신문조서 및 판결문 그리고 고 배환중, 최용주, 김선출, 박진의 진술서와 조서 등이다. 아울러 당시 전남대 총학생회 사무실에서 압수한 300여 가지의 압수물건 총목록 등도 포함되어 있다.

나는 우리 모두의 것이기에 부끄럽지만 나의 당연한 책무로 생각하고, 관련 기록물 일체를 공개하고 기증하기로 결심했다. 그래서 우선 5월 항쟁과 관련한 1980년, 저들의 만행과 아픈 기억, 즉 나의 행적을 이 기록물들을 통해 조금이나마 실체적으로 드러내고자 한다. 말 못하고 고민해 온 나의 기억을 3회에 걸쳐 개괄적으로나마 밝히면서, 나 때문에 애달파한 고마운 선후배 동료들께 이 글을 바친다.

1. 5·18광주민중항쟁 전야와 상황일지

1980년 2월 27일 정부는 긴급조치9호를 해제하였다. 약 1,000명 이상의 긴급조치9호 관련
련자들은 2월 29일에 사면․복권되었다.

10·26사태 이후 우리 모두는 기뻐했고 희망을 꿈꾸면서 정동년 6·3사태 관련자, 김상윤 등 민청학련 관련자, 송기숙 교수와 정용화 등 교육지표사건 관련자 등 전남대의 관련자들도 대다수 복적·복직하였다.

나 또한 전남대 사대 국사교육과 2학년에 복적하여 다시 학교를 다닐 수 있게 되었다. 복직 교수 환영회, 학원 자율화 등을 주장하는 공청회, 어용교수 백서 발간에 관련한 회의에 참석하고, 총학생회 설립 준비를 하여 총학생회장에 박관현이 당선되는 등 정신없이 바쁜 가운데 5월을 맞이하게 되었다.

5월 초반까지의 전남대 민주화운동은 주로 교내민주화운동에 국한되긴 했지만 사실상 진행되는 과정에서 여러 문제가 노정되었다. 조직적 항쟁과 정세분석이 절대 중요했다. 그리하여 총학생회장 박관현과 양강섭, 한상석, 박몽구, 문승훈 등은 5월 6일 16시경 교내학생회관 검사실에서 모임을 갖고 학원 민주화, 비상계엄해제, 민주정부수립을 위한 국내외 정보분석, 총학생회 집행부의 문제점과 광주권 각 대학 상황 분석을 통해 효율적인 집회 및 시위 실행 등을 위한 비밀기획실의 설치와 한상석이 그것을 주도한다는 데 합의하였다.

합의에 따라 총학생회의 양강섭과 기획실의 한상석, 송선태, 문승훈, 박몽구는 5월 14일부터의 전남대의 교외 집회시위를 기획하고 이를 상황일지에 한상석이 주로 기록하였으며, 송선태와 문승훈이 보조하였다. 이 상황일지를 한상석, 송선태가 보관하다가 5·18이후 도피과정에서 송선태가 문승훈에게 넘겨주게 되었다. 그러나 문승훈의 신문조서에는, “5월 15일 12시경 동교 사범대학 앞에서 전대 철학과4년 한상석이 교부하는 전남대학교 학생운동의 방향, 국내의 정세분석, 계엄군의 작전분석 및 행동상황과 전국 대학생의 동향 등을 기록한 상황일지(일명, 자유노트)를 받아 보관”한 것으로 되어 있다. 즉 한상석에게서 내가 전달받은 것으로 정리하였기 때문에 한상석은 나 때문에 내가 검거된 이후에 또 조사를 받게 되었다. 그것은 내 기록에 남아 있다.

상황일지에는 당시의 급박한 상황 속에서의 정세분석을 기본 내용으로 하여 5월 14일부터16일 15시경까지의 가두시위 계획이 치밀하게 기록되어 있다. 특히 전남 도청 앞 광장에서의 시위계획이 구체적으로 정리되어있는데, 이때 박관현 총학생회장은 광주 시내 대학생 15,000여명과 함께 집결하여 ‘계엄령 해제’, ‘노동권 보장’, ‘민주화 일정조속실행’ 등의 구호를 외치면서 횃불을 들고 경찰의 보호와 함께 평화롭게 집회 및 시위를 하였다.

사실 이때 우리는 거의 집에 들어가지 못했다. 특히 일부 복적생이나 총학생회 집행부는 학
교에서 주로 지내면서 비상의 경우에 대비하였다. 나도 그랬다. 그러고 있는 와중에 5월 항쟁이 터졌다.

나는 도피 후 검거(2회에서 진술 예정)된 이후, 1980년 12월 10일에 육군고등검찰부에서 검찰 측의 증인으로 참고인 진술조사를 받게 되었고, 공판에도 끌려가게 되었다.

같은 피의자로 영창에 잡혀있으면서 나는 검찰 측 증인으로 끌려가서 강요된 증언을 해야만 했다. 영창동료는 피고인 자리에 서있고, 가족은 와서 방청하고 있고......

그때의 내 심정을 상상해 보세요. 나는 배신자라는 비아냥을 그 이후 30년 이상 감수해야 했다. 검찰 측 증인으로서 받은 이익은 나에게 아무것도 없었다. 오히려 나는 이것 때문에 영창에 있으면서 505보안대로 가서 두드려 맞고 검찰관이 원하는 데로 진술해야 했다. 아니 그네들이 타자치는 데로 동의해줘야 했고 반문하면 터졌다. 심적 쓰라림은 배가 되어 치솟아 올랐다.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피가 역류한다. 미친다.

상황일지 내용을 각 페이지별로 낱낱이 조사받았다. 특히 아래의 신문 때는 더욱 고통을 받았다. 그들의 시나리오대로 대답해야만 했다. 그들은 집요하게 나를 죽이고 있었다.

문 : 그러면 그것(상황일지)은 누가 작성한 것인가요?
답 : 한상석은 당시 학내에서 영향력이 컸으며 따라서 학내에서 표면적인 활동은 한상석이 주로 도맡아하는 실정이었습니다. 따라서 표지에는 한상석의 작성으로 되어 있으나 실제로는 당시 모의를 주도했던 정동년형, 박관현씨 등 학생시위를 주도했던 자들의 공동계획서인 것입니다.....(중략)
문 : 계속하여 3번째 장을 설명하시오?
답 : 이는 학생동원 계획표인데 그 내용을 설명드리자면 먼저 총학생회란 박관현을 뜻하는 것이며 자체집행부란 한상석을 뜻하는 것인데 동소에서 주로 기획을 하여 박관현 등 학생시위 주동자들과 협의한 뒤 총학생회 총무였던 양강섭을 통하여......(이후 원본 복사본 글자불량으로 중략)
문 : 13번째 장에는 어떠한 내용이 있나요?
답 : 먼저 5.19경 폭동계획을 수립한 것으로 그 내용을 보면 일시는 5. 19 14:00 ~ 18:00로 하고 이슈는 강제농정철폐, 농업임시법 즉각 철폐, 추곡수매가 예시(글자 불분명)로 하며 조직은 카톨릭농민회 본부를 통하여 카톨릭노동청년회를 이용한다. 폭동방법은 죽창, 배터리 등을 준비하여 폭동을 일으킨 후 방송국과 공공건물 및 예비군무기고를 접수한다. 그리고 광주권 학생 약800명을 동원한다.(이하 글자 불분명으로 중략)
문 : 용어가 상당히 격렬하거나 용공적인 표현같은데 어떤 가요?
답 : 일면 그런 표현이 있으나 사회학에서 쓰이는 것입니다.
문 : 특히 5.19폭동기획을 보면 실제로 그러한 일이 이번 광주사태에서.....(특히 이 부분에서부터 답까지 원본불량으로 글자가 알아볼 수 없을 정도여서 중략합니다.)
문 : 16번째 장에는 어떠한 내용이 있나요?
답 : 휴교조치 후 등교하라, 등교 못하면 우체국으로 집결하라고 되어 있고 그 내용에 대한홍보를 강조하고 있으며 또한 시위의 방법으로 여학생 6명이 소복차림으로 흰 장갑을 끼고 태극기 전위대를 앞세우며 나머지 인원은 태극마크 머리띠를 착용하는 것으로 되어있습니다.
문 : 26번째 장과 27번째 장에는 어떠한 내용이 있나요?
답 : 16일과 19일 계획이 있는 데 휴교시 19일에 중점을 두고서 비상연락망을 점검하는 것으로 되어 있으며 19일 계획은 이미 말한 바와 같이(원본불량으로 글자가 알아볼 수 없을 정도여서 중략) 300명의 학생동원을 요청하고.....북동성당에 집결한다......연락망은 1:1 원칙
으로 한다......(중략)

당시 나는 이런 증언 강요의 목적이 김대중-정동년-박관현-전남대로 이어지는 조직 도표를
조작하여 김대중내란음모사건과 5월 항쟁을 한 묶음으로 하여 폭동화시키려는 시도임이 분명한 것으로 알고 있었다. 여기에 상황일지가 악용되었고 나는 얻어터지고 강제 증언해야만 했다.

상황일지를 빼앗긴 원죄 때문에 누구에게도 말 못한 채 지금까지도 괴로워했던 것이다. 이 글을 빌어 1980년의 12월 마지막 언저리에서 있었던 나의 증언으로 인해, 혹시 나 때문에 피해를 입으신 당시의 상무대 영창 5·18선후배동료들께 진심으로 사죄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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