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의 독립운동가 김대지(金大池)선생
4월의 독립운동가 김대지(金大池)선생
  • 김석영 객원기자
  • 승인 2012.03.31 04: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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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대지 선생

국가보훈처는 대한민국임시정부 임시의정원 의원 등 요인으로 활동하면서 곽재기의 밀양경찰서 폭탄 투척과 일제요인 처단 등 의열단의 활동을 지원한 김대지 선생(1891. 10. 7 ~ 1942. 10. 26)을 4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하였다.

선생은 1891년 경남 밀양군 밀양읍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강직한 성품을 지녔던 선생은 부친의 엄격한 가르침 아래 한학을 익히고 선비로서의 절개와 지조를 배웠다. 1905년 밀양지역의 반일독립투사 양성의 요람인 동화학원에서 수학한 후 민족교육 활동을 전개하였다.

선생은 밀양에 청년회관을 건립, 비밀결사 조직의 터전을 마련하고 이곳을 중심으로 항일투쟁단체인 일합사(一合社)를 조직하여 밀양지역의 청년들과 함께 독립운동의 전개방법을 모색했다. 또한 광복단, 대한광복회 등의 비밀항일독립단체에 참여하는 등 보다 적극적인 독립운동을 추진해 나가기 시작했다.
1910년대 후반부터는 국내 항일운동의 한계를 절감하고 중국, 만주 등지를 왕래하며 활동을 전개하던 중 검거되기도 하였다. 출옥 후 고향인 밀양에서 비밀결사조직을 추진하다 여의치 않자 만주로 이주하여 본격적인 독립운동에 투신하였다.

1919년 국내에서 3․1만세운동이 전개되던 시기, 만주로 망명한 선생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태동기부터 임시정부 의정원의원과 국무위원을 겸임하여 활동하면서 임시정부의 기초를 다지는데 헌신햇다.

한편 중국 동삼성, 북경, 길림, 상해를 왕래하면서 비밀결사조직의 구성원, 연락기지, 무기, 자금 등의 확보를 위해 동분서주하였고, 마침내 1919년 11월 의열단을 탄생시키는 데 기여하였다. 선생은 임시정부 요원으로 활동을 계속하면서 의열단의 활동을 실질적으로 지원하는 등 민족독립을 위해서는 모든 방법을 강구해 나갔다.

이후 1926년 영고탑으로 옮겨 1929년까지 만주지역의 독립운동단체통합운동에 전념하였다. 그러나, 김동삼이 밀정에 의해 체포되고 김좌진 마저 피살되면서 민족유일당 결성을 위한 노력은 결실을 맺지 못했다. 선생은 항일독립운동 전 기간을 통해 특정 계파나 주의에 연연하지 않고 항상 균형 감각을 지니고 일본제국주의에 맞서 싸웠으며, 무력투쟁과 혁명을 통한 완전한 자주독립노선을 표방하면서 활동하였다.

1942년, 선생은 이역만리 만주에서 그토록 열망하던 조국의 광복을 보지 못한 채 51세의 나이로 영면하였다. 선생은 국내외를 오가며 오직 우리 힘에 의한 조국의 완전한 독립을 쟁취하겠다는 일념으로 풍찬노숙을 마다하지 않고 평생을 항일독립운동에 헌신한 독립투사였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로를 기려 1980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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