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레박통신(14) - 참 스승 허병섭, 그를 기려본다
두레박통신(14) - 참 스승 허병섭, 그를 기려본다
  • 이무성 온배움터 녹색대학교 총장
  • 승인 2012.03.30 0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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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무성 총장

스승 없는 시대에 마음 속에 존경의 대상으로서 자신을 채찍질을 해 줄 수 있는 선생님이 존재한다는 것은 큰 행복이다. 전혀 다른 삶을 살아옴에도 삶의 깊이와 풍겨오는 향기에 의해 스승으로 흠모하기도 한다.

이번 두레박 통신엔 사람읽기의 형태로 스승으로서 한 인물을 소개 해 보고자 한다.
지난 27일 운명하신 허병섭, 그는 영원한 청년으로서 그와 접한 모든 사람들을 감동시키는 이 시대의 큰 스승이었다. 1941년 생으로 한때 서울 청계천 빈민운동을 함께 하였지만 지금은 다른 길을 가고 있는 두레의 김진홍 목사, 이명박 대통령과 같은 해에 같은 지역권에서 태어난 분이다.

그는 경상도 김해 출신으로 대구에서 청소년기를 보냈지만 전라도에 더 많은 정서적인 유대를 갖고 있다. 서울 하월곡동에서 동월교회라는 가난한 자들을 위한 민중교회를 개척하여 국악으로 예배를 보기도 하였다. 그는 실천적인 목회자이었다.

오늘날 지역아동센터의 모태가 된 ‘똘배의 집’, 자활후견기관으로 이어진 ‘건축일꾼 두레’ 등에서 그와 함께한 많은 분들이 전라도에서 올라온 분들이었다. 한국교회 최초로 현직 목사직 사임서를 1988년에 자신의 소속 교단인 기독교장로회에 제출하기도 하였다.

함께 활동하다 경찰서 등에 끌려가더라도 자신이 목회자라는 성직자 때문에 다른 노동자들과는 차별적인 대우를 받은 것에 대한 죄책감 때문이었다. 더욱 목사라는 직위에서 오는 기존 제도권 교회의 안주에 대한 영혼의 자유스러운 해방으로서 1988년에 목회직을 내 던지었다는 그의 변이다.

이후 미장장이로서 노동자들과 똑같은 삶을 살아갔다. 이들과 함께 담배도 피우고 못 마시던 술도 나누면서 친구겸 이웃으로서 함께 됨을 원하였던 것이다. 도시사회 모순의 근원적인 해결을 위해 일선 정치신인으로서 도봉구청장에 출마의사를 1990년대 한 때는 밝히기도 하였다.

주변 정치인들에게 자신의 뜻을 적극 전달도 하였다. 향후 그를 정치적인 경쟁자로 인신한 기득 정치인들에 의해 현장 정치인으로서 꿈은 좌절되기도 하였다. 이후 생태교육을 위해 귀농을 결심하였다. 처음엔 전남 화순 인근에 생활의 공간을 당시 윤영규 전교조 위원장과 함께 모색하기도 하였다.

결국 개발의 때가 덜 묻은 무주군 안성면 진도리로 삶의 동아리를 틀게 된다. 현 광주 지혜학교 교장이신 김창수님 등과 함께 폐교를 활용하여 푸른꿈 고등학교를 개교하였다. 이전과는 다른 제도권내에서 새로운 대안학교의 모형을 창출해 나간 것이다.

이후 2003년엔 제도권 밖의 대안대학으로서 녹색대학교를 영호남이 어울러질 수 있는 지리산 자락인 경남 함양에서 출범시켰다. 그의 뜻들을 여기에 집중하였다. 그가 평생 붙잡고 있는 화두는 ‘스스로 느껴서 말하고 행동하게 하라’이었다.

그는 명예와 공은 상대에게 돌리고 철저히 자신의 명예가 외부로 노출되는 것을 극히 싫어했다. 예수보다 더 예수의 삶을 행동으로 실천한 허병섭이었다.

예수는 33년의 현생에서 단 3년의 삶을 기득권에 대항하여 싸웠지만 그는 전생애에서 투병생활 중인 3년을 제외한 거의 70평생을 소외받고 희망없는 가난하고 헐벗은 사람들과 함께 한 것이었다. ‘부모나 형제, 자매까지 버리고 나를 따르라’는 예수의 부르짓음을 그대로 실천하시는 분이 목사 아니 인간 허병섭이었다.
 
이 시대의 의인으로서 진정한 큰 스승이 얼마 전 우리 곁을 떠났다. 철저히 자신을 해체하여 하나의 밀알으로서 그 역할을 톡톡히 해 내신 분이다. 참 어른, 허병섭 그 분의 편안한 영면을 기원해 본다.
/이무성 온배움터 녹색대학교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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