老화백의 아름다운 선물
老화백의 아름다운 선물
  • 시민의소리
  • 승인 2001.06.11 00: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조선대에 작품·재산 기증한 김보현 화백>


붓질만으로 살아온 한 미술가가 평생 동안 작업한 작품 340점과 이국 땅에서 맨손으로 일군 전 재산을 조선대에 기증했다. 조선대는 이 뜻을 기려 조선대 정문입구에 '김보현·실비아월드 미술관'을 건립한다.

김보현 화백(84). 그는 지금 미국 뉴욕에 거주하며 활동하는 화가. 그가 조선대에 세워질 그의 미술관 건립 문제를 학교측과 논의하기 위해 그의 부인 실비아 월드(86)와 함께 지난주 귀국, 광주에 왔다.

그는 1955년 미술공부를 더 깊숙이 하기 위해 미국으로 건너가 현대미술의 중심지인 뉴욕에서 뿌리를 내렸다. 1969년 현지에서 결혼한 부인 실비아 월드도 미국에서 인정받는 화가이면서 설치조각가로 활동하고 있다.
50년 가까이 미국에서 살아온 그가 조선대로 귀향(?) 선물을 보낸 이유는 뭘까.


조선대 초대 예술학과장 인연이 노화백의 광주귀향 선물

그는 경남 창녕에서 태어나 광주와는 탯자리 같은 인연도 없다. 그가 일본 동경 태평양미술학교를 수료하던 해인 1946년 조선대가 설립된다. 곧바로 예술학과(현 미술학과)가 신설되고 그는 초대 예술학과장으로 부임했다.

1950년 학생들과 홍도로 야외 스케치를 나갔다가 좌익혐의로 경찰에 연행되어 죽을 고비를 넘기는 등 고통을 겪는 동안 1955년 미국 일리노이주립대의 교환교수 요청을 받고 미국행 비행기를 탔는데 그냥 눌러앉게 된 것이다.

조선대 10년간 교수 생활이 그에겐 미국 생활 50년보다 더 길었던 것일까. 시간적 길이가 아닌 물리적 공간상 길이에서 말이다.

교환교수 2년을 마치고 그는 생활고를 겪는다. 시간당 1달러를 받으며 넥타이공장에서 넥타이에 그림을 그려 넣는 일로 빵을 해결하면서도 한국에서 고문 받던 악몽에 시달렸던 그에겐 모든 제약에서 해방된 세계인 미국이 편했다. 다국적 예술세계에서 그가 지향하던 아방가르드 세계를 발견하고 1962년 뉴욕에 정착하면서 그의 미술세계는 각광받는다.

1995년 서울 예술의 전당에서 가진 원로작가 초대전에 출품한 작품이 300여점. 전시를 마치고 그는 이 작품들을 미국에 가져가기 보다 한국에 전시할 독립미술관 건립을 구상했다. 그러던 중 조선대로부터 작품 기증 요청을 받는다. 처음에는 1∼2점 정도 기증을 구상했다가 조선대 미술학교 최초의 교수로서 후학들을 위해 작품 전부를 기증하기로 결심, 지난해 2월 작품 340점을 기증한 것이다. 조선대는 이에 지난해 9월27일 김보현·실비아월드연구소를 미술관 안에 개소했고, 김화백을 조선대 명예교수로 위촉했다.


50여년 미국서 작품 활동…1950년대 좌익 몰려 고초 맨손으로 미국행

그는 그 자리에서 자신의 전재산인 미국의 건물 기증 의사를 밝힘에 따라 지난해 11월 조선대와 김화백 간에 뉴욕빌딩 기증 합의의향서도 교환했다.

김화백이 부인 실비아 월드와 함께 살고 있는 이 건물은 뉴욕의 심장부 맨해튼 거리에 위치한다. 연건평 1천여평 규모의 8층 건물(싯가 2,000만 달러, 한화 200억원). 조선대는 이 건물에 '김보현·실비아월드 문화재단'을 설립하고 조선대 뉴욕분교로 활용하기로 했다.

그는 "전혀 생각지도 않았던 순간적인 심경의 변화였다"라며 "지금은 나 자신, 그리고 학교, 나아가 한국을 위해 좋은 선택이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정말 단순한, 순간적인 선택이었을까. 그 의미는 그의 작품세계를 보면 이해가 된다. 미국 뉴욕의 한 비평가는 그의 미술세계를 '젊은 시절에 잃어버린 순진성에 대한 동경을 가지고 생과 사를 바라보는 꿈과도 같은 사유와 축복이다'고 평한다. 박정기 교수(조선대 미술학부)는 "자유롭게 풀어헤쳐진 꿈과 상념의 세계는 그에게 있어 삶의 의미가 여전히 절실하다는 반증"이라고 보았다.

그의 작품에서, 삶에 대한 그의 태도에서 그대로 우러난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마치 참선하듯이 마음을 집중시키며 그렸다" "꽃은 이미 아름답다. 그러나 사소한 사물들도 자세히 들여다보면 나름대로의 아름다움을 갖고 있다. 나는 이런 아름다움을 찾고자 한다"


조선대 그 뜻 기려 '김보현·실비아월드 미술관' 건립키로

지금 80을 훌쩍 남긴 나이에도 그는 주로 대작만을 작업한다. 1000호, 3000호 크기의 캔버스를 벽에 걸고 계속 그린다. 그는 그 작업을 "일한다"로 표현했다.

지금도 "한시도 멍하니 앉아있다거나 무료하게 시간 보내는 일은 없다". 그에게 있어 "쉰다"는 의미는 "신문이나 잡지 읽는 것이다"고 말을 보탠다.
"늦게 깨달아서, 이제 얼마남지 않은 시간 일 많이 하겠다"고 말을 맺는 그. '말을 많이 아낀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그것 또한 그의 삶, 그대로 이며 고국에 대한 향수를 그렇게 달래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한국에선 50년 동안 '잊혀진 작가'였던 김보현 화백. 비극적인 한국 현대사의 피해자로, 조국에서 입은 상처를 예술혼으로 승화시킨 예술가가 평생 이국 땅에서 일군 자신의 모든 것을 조국에 환원하기로 한 결정은 그의 표현만큼 단순하지는 않다.

조선대와 다시 맺은 인연을 "결과가 좋아 기분좋다"고 말하면서 두 가지 걱정을 내놓았다. 하나는 미술관 설계 문제와 또 하나는 학교측의 경제적 협조문제다. 제대로 된 설계와 디자인, 그리고 건축비용도 만만치 않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