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꼭 해야 할 일 '하나'
우리가 꼭 해야 할 일 '하나'
  • 강정채 전 전남대총장
  • 승인 2012.03.22 17:25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강정채 전 전남대총장
박노해가 이런 시를 썼다. ‘넌 나처럼 살지 마라’. 모든 부모들의 마음이 담겨 있다.
그 싯귀 중에 “아버지,/술 한잔 걸치신 날이면/넌 나처럼 살지 마라// 어머니, /파스 냄새 물씬한 귀갓길에/넌 나처럼 살지 마라// 이 악물고 공부해라/좋은 사무실 취직해라/악착같이 돈 벌어라”라는 첫 구절이 나온다.
참으로 안타까운 부모의 쓰라린 상처 같은 이야기들이다. 세상에 대한 한탄의 소리이다. 그러나 자식은 이렇게 힘들게 살아온 부모가 자신에게는 하늘이라고 말한다. 직업이 무엇이든 배운 게 어느 정도이든 당당하게 살아가는 자식이 되겠다는 포부를 밝힌다.

서른 살의 중국인 여자 교수가 말기 암에 걸려서 죽음을 바라보며 쓴 <오늘 내가 살아갈 이유>에서는 “뭔가를 이루기 위해 전속력을 달리는 것보다 곁에 있는 이의 손을 한 번 더 잡아보는 것이 훨씬 값진 일이라는 것을” 이야기 한다.
그녀는 스무 살 때는 스스로를 아끼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했지만 서른 즈음에는 다른 사람에게 관대한 태도를 취하는 것이 스스로를 아끼는 방법이라는 진실을 알게 되었다고 말한다.

중국의 유명한 문학가인 노신은 1925년에 쓴 <전사와 파리>에서 “전사가 죽었을 때 파리들이 맨 먼저 발견하는 것은 그의 결점과 상처이다. 그들은 그것을 빨며, 웽웽거리며 날아다니고 자신들이 죽은 전사보다 더 영웅인체 득의만만해 한다. 전사는 이미 죽었기에 파리를 쫓지 못한다”고 말했다.
1980년대의 광주를 이야기하는 것 같다. 황지우 시인은 <오월의 신부>에서 “한 세상 끝나고 나니 왜 이리 좋을까(중략) 우리 모두 죽음을 넘어 여기까지 와버렸다”면서 상처로만 남은 우리의 가슴에 달겨들 파리를 생각해보게 되었다.

이제 그 상처를 넘어 무등산을 이야기하고 싶다. 광주 시민들에게는 무등산은 모성이다. 고은 시인도, 이성부 시인도 그리고 무등산 타잔도 무등산에서 소박한 삶을 살아가고 있음을 노래했다. 울부짖었다.
그런데 무등산은 난개발과 쓰레기 투기로 몸살을 앓았다. 80년대의 암울한 광주의 상황을 이야기하듯 무등산은 시민들의 무분별한 이용 행위들로 상처를 입었다.

이 때 광주전남산악구조대 김인주 대장을 비롯하여 많은 이들이 무등산에 난개발을 일으키는 건설사업에 대한 저지운동을 벌였다.
그렇게 시작된 무등산 보호운동을 확산되었다. 쓰레기를 버리지 말자, 쓰레기를 치우자, 개발을 저지하자. 복원하자, 교육하자, 참여하자, 알리자. 이렇게 해서 협력하고 아름다운 운동이 시작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무등산을 돌며 공부하기 시작했다. 김언거와 영풍정, 윤상원 열사의 생가, 고봉 기대승과 월봉서원, 백수량의 白碑, 고산서원, 하서 김인후 선생의 삶 등 무등산에는 수많은 이야기가 있었다.

그렇게 해서 시민연대사업, 무등산사랑환경대학, 무등산정책포럼, 무등산공유화운동 등이 벌어졌다. 무등산 소식지는 매월 발행해 1994년 1월 이후 벌써 226호를 발행했다.
이렇게 무등산 사랑운동이 대구 팔공산 등 전국의 유명 산 들에 영향을 끼쳤다. 우리가 한 번 팔공산을 다녀오는 중에 회원들이 쓰레기를 주워 내려오니 대구 사람들이 우스개로 “저 사람이 우리 동네 쓰레기를 다 주워가네”라고 말할 정도였다. 그래서 그 곳도 깨끗해지기 시작했다.

가장 중요한 것은 공부하는 일이다. 2009년 8월 이후 매주 화요일 오후 5시면 무등산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모여 무등산을 중심으로 한 자연생태 및 인문학 공부를 하고 있다.
우리가 높은 산을 바라보고 올바른 길을 살아가면 설사 그곳에 이르지 못하더라도 마음에는 늘 희망을 품을 수 있다. 여러 분도 무등산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시작해 우리 주변의 모든 것을 사랑하길 바란다.

/강정채 전 전남대 총장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