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뿐인 '측우기' 진품을 보신 적이 있나요?
하나뿐인 '측우기' 진품을 보신 적이 있나요?
  • 김석영 객원기자
  • 승인 2012.03.21 17: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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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년 만에 첫 공개- 일본에서 되찾아 기상청 소장 중
▲ 금영측우기

기상청(청장 조석준)은 3월 23일 세계기상의 날을 맞아, 우리나라에 유일하게 남아있는 진품 '측우기'를 공개한다. 이는 일본에서 되찾은 지 40년 만에 처음으로 국민에게 공개되는 것이다.

현재 우리나라에 남아있는 '측우기'는 기상청에서 소장하고 있는 ‘금영측우기’(보물 561호)가 유일하다. 이는 일제 강점기 때 일본인 와다(和田雄治)가 일본으로 가져갔던 것으로, 1971년 4월 3일 당시 양인기 중앙기상대장이 일본 기상청장 다카하시(高橋好一郞)에게서 돌려받아 기상청에서 보관해왔다.

조선시대는 세종시대(1441년)에 발명된 '측우기'로 세계 최초로 과학적이고 정량적인 강우량 측정이 가능했다. 지방 군․현까지 전국 334곳에서 측우기를 이용해 강우량을 관측하고 이를 중앙 정부에 보고했다.

이는 세계에서 유래를 찾기 힘든 전국 관측망이었다. '측우기'는 1592년 임진왜란으로 하나둘 사라져 몇 줄의 측우기록만 남아 있다가, 영조대왕(1770년) 때 다시 전국 8도의 측우기 관측망을 복원하였다.

현재 남아있는 ‘금영측우기’는 1837년 공주 감영(금영)에서 사용하던 것이며, '측우기' 받침대인 '측우대'도 현재는 5대(기상청 2대, 국립고궁박물관 1대, 국립중앙과학관 1대, 창경궁 연경당 1대)만 남아 있다.

기상청은 역사 속 기상기록과 기상유물을 통해 과거 기상현상을 연구하는 작업을 시작하고 있다. 2011년에는 창덕궁 '측우대'(1782년 제작, 보물 844호) 복원 작업을 통해, ‘가뭄에 시달리는 백성들의 고통을 함께 나누기 위해 왕(정조)이 양산을 거두라 하시고 기우제를 드리셨다’는 '측우대'의 기록 내용을 완벽하게 밝혀내기도 했다.

기상청은 3월 23일 세계기상의 날에 보라매공원 기상청 본청에서 진품 '측우기'를 공개하고, 우리나라의 기상관측 역사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사진전도 함께 한다.

□ 측우기는 누가 만들었을까요?
문종이 왕세자이던 시절인, 1442년 깊이 1.5척(약 30cm), 직경 7촌(약 14cm)인 이 기기를 제작하고 그 이름을 '측우기'라 하였다. 강수량의 깊이는 '주척'이라 불리는 자를 사용하여 측정하였다. 이러한 측정기기는 곧 조선 전역의 각 고을마다 설치되었다. 1592년부터 8년간의 임진왜란으로 전국의 측우기는 사라졌고, 300여년이 지난 1770년에 영조대왕에 의해 다시 복원되어, 20세기 초 조선 왕조가 끝나기 전까지 지방과 고을의 강우량 측정자료가 남아있다.

○ 한때 '측우기'를 ‘made in China’ 라고 주장하는 경우가 있었는데?
1770년 영조가 세종 때의 측우기를 재건하면서 '측우대'에 ‘건륭경인오월조(乾隆庚寅五月造)라고 청나라 연호를 사용했기 때문에 청나라 사람이 만들었다고 잘못 이해하고 있다. 우리가 지금 서기를 연호로 사용하듯이, 그 당시 우리나라를 비롯하여 동아시아에서는 모두 청나라 연호를 사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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