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지내십니까?>박선홍 효성청소년문화재단 회장
<어떻게 지내십니까?>박선홍 효성청소년문화재단 회장
  • 정인서 기자
  • 승인 2012.02.23 15:2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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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은 팔팔한 나이겠다. 밝은 눈과 청명한 정신을 갖고 있어 지금도 책을 집필 중이다. 광주의 산증인이라고 할 만큼 광주를 사랑한 대표적인 이를 들라 한다면 박선홍 선생을 빼놓을 수 없다.
나이 듦을 한탄하는 이도 있지만 나이는 경험의 산물일 뿐 여전히 활동가라는 직함을 붙일 정도로 움직인다. 평생을 광주토박이로 살아온 그는 광주를 사랑하는 일에 누구보다 열정적이다.
‘광주1백년’과 ‘무등산’이라는 말을 들으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사람이 누구일까? 광주를 대표하는 수많은 인물들도 있고, 무등산에서 살며 나름대로 활동하신 분들도 꽤 많다. 그러저런 분들을 들자면 정말 일일이 나열할 수 없을 정도겠다.

‘광주이야기’의 살아있는 백과사전

그래도 지금 우리가 만나볼 수 있는 분들 중에는 단연 박선홍 선생님을 들 수 있다. 그가 있었기에 광주를 알고 싶은 이들에게 필요한 귀중한 자료들이 정리되고 있다.
그는 <광주1백년>을 통해 광주의 소중한 역사를 정리했다. 많은 이들에게 역사를 거슬러 기록을 찾을 때 소중한 참고자료로 활용하는 대표적인 책이다. 아마도 이 책이 없다면 아무리 인터넷시대라 해도 과거 기록을 검색하는 데 좀 힘이 들었을 듯싶다.

그런가하면 7판째 발행하는 <무등산>은 무등산의 역사와 설화 등을 정리한 독보적인 최고봉의 문헌이 아닐 수 없다. 무등산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싶거든 결국 이 책이 모두를 담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귀중하다.
올해로 여든여덟. 젊은이처럼 빠르게 몸을 움직일 수는 없지만 정신만은 살아 팔팔하게 뛰고 있다. 그의 기억 속에는 광주의 시시콜콜한 일들이며 무등산의 모든 이야기들이 들어 있다.
오늘은 ‘광주이야기’를 하기 위해 그를 찾았다.

“아니, 무슨 일이에요. 너무 오랜만이에요. 어떻게 살았어요.”
20여년 만에 공식적으로 만난 박선홍 선생은 다른 이야기보다 우선 기자의 안부를 물었다. 이런저런 인사말을 나눈 뒤 의향 광주의 가치를 한 마디 부탁했다.
“광주는 의향이라고 하는 데 무엇으로 우리의 가치를 삼을 수 있습니까?”
그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임진왜란 때의 제봉 고경명과 김덕령 장군 이야기’가 술술 풀려나오더니 더 거슬러 정지 장군까지 예를 들며 “우리 지역 의병장이 결국 나라를 지켜낸 인물들이었다”고 했다.

무등산 지킴이로 평생 살아

다시 근대로 돌아와 “3.1운동과 2.8독립선언의 주역이 광주 사람들이었으며 5.18광주민중항쟁에 이르는 역사들은 국란 때마다 나라를 일으킨 원동력이 되었다”고 설명한다. 광주가 의향의 도시일 수밖에 없다는 이야기이다.
그는 “이러한 정신을 가진 광주가 이제는 그 정신을 살려낼 수 있는 흔적과 기록을 정리하고 그것을 문화중심도시에 연계하는 게 좋겠다”고 강조했다.

이러한 역사적 기록들을 빼놓지 않기 위해 최근 다시 <광주1백년>을 수정 작업 중이다. “올해 안에는 우선 끝내야겠다”고 마음을 품었다. 하루에 한 줄도 쓰고 한 장도 쓰는 등 정성을 다한다.
지난 2008년에 발행했던 <무등산>도 거의 마찬가지이다. 원래 초판은 1976년에 발행했다. 그리고 매년 조금씩 더 자료를 모으고 다듬으면서 32년 동안 수정작업을 했다. 그래서 지난 2008년에 7번째 <무등산>을 간행했다. 이처럼 그는 무등산 지킴이로 평생을 살았다.

그는 “무등산은 우리 지역의 진산이며 남도민의 신산이다”라고 말하고 “산세가 유순하여 동서남북 어디에서 보나 둥그스름한 모습이 한결같아 보는 이로 하여금 믿음직스럽고 후덕한 느낌을 준다”고 했다.
그는 “충장로에서 태어나 광주천이 유일한 놀이터였고 충장로 집에서 봉창만 열면 무등산이 보여 걸음마를 떼면서부터는 어머니가 다니던 증심사를 따라다니면서 무등산을 올랐다고 해도 될 성 싶다”면서 “그런데 나이가 들면서 땔나무를 하던 시절이라 숲이 사라지는 것을 보면서 산을 지켜야겠다는 마음을 먹었다”고 말했다.

 


곳곳에 흔적 남긴 광주경제의 산증인

1926년 광주에서 출생한 그는 1949년 조선대 경제학과를 수료하고 전쟁 직후인 1952년부터 1993년까지 40여년이 넘게 광주상공회의소에서 근무했다. 이런 면에서 그는 광주경제의 산증인이기도 하다.
‘광주권생산도시화운동’을 벌이는 데 앞장섰고 광주시가 공단을 조성할 돈이 없어 기업인들이 참여를 통해 민간자본을 모아 송암공단과 본촌공단을 처음 시에 위탁하여 조성하기도 했다는 것이다. 이것이 도화선이 되어 이후에 송언종 시장 시절 하남산단을 만드는 기폭제가 되었다고 덧붙였다.

 

산을 좋아했던 그는 1952년 보이스카우트 ‘무등소년대’를 창단했고, 1955년 호남 지역 최초의 전남산악회 조직, 1969년에는 전남산악연맹을 창설했고 그 뒤로 수많은 단체 결성에 참여하여 1989년에 산악단체, YMCA, YWCA, 흥사단, 보이스카우트 등을 규합해 ‘무등산보호단체협의회를 결성하기에 이른다.
무등산의 적극적인 보호활동을 위해 1994년에 무등산환경대학을 개설했고 무등산 파괴 행태가 날로 심각하여 대안운동으로 1991년 무등산 시민 땅 한 평 갖기 1천원 모금운동을 시작해 10년만인 2001년에 무등산공유화재단을 설립, 무등산의 난개발과 환경파괴를 막는 데 힘을 기울여 수백만평을 공유화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특히 1994년부터 1999년까지 학교법인 조선대학교 이사장으로 있으면서 치과병원 증축, 학교장 책임운영제 등 지역 사립대학의 성장에 크게 기여했다. 1996년엔 광고모델로 받은 3천만원 전액을 무등산보호운동에 기부했던 그는 1998년 광주사회복지공동모금회 창설 등 지역발전에 기여한 흔적들이 여기저기 스며들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이다.
이런 공로를 인정받아 대통령 표창부터 광주시민대상까지 받았고 조선대는 지난해 2월 그에게 명예박사학위를 수여했다.

“무등산 사랑이야기나 더 써야지”

“이제 나이 들어 손도 잘 나아가지 않는다”면서 “광주1백년이나 올해 안에 제대로 정리됐으면 좋겠다”는 뜻을 비쳤다. 어떤 일이든 혼자 하기는 힘이 든다. 그를 도울 수 있는 길이 있으면 누군가 후원했으면 하는 바람도 들었다.
‘영험스러운 산’, ‘덕스러운 산’, ‘민주성지’ 등 수많은 수식어를 단 무등산. 그런 가운데 ‘터줏대감’, ‘맏형’, ‘원로’ 등의 이름을 붙여주기도 하지만 그에게는 그저 부끄러울 따름이다.

“세상 살아가는 이치가 무등산처럼 둥글둥글 하다면 갈등이나 대립도 없을 것 아니냐”며 “아직도 무등산에 관한 이야기를 더 찾아 정리하고 무등산 사랑이야기를 더 담아내려 한다”는 소망을 내비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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