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구 박사의 중국이야기 17 - 한국 화교, 영화와 쇠락의 변천사
강원구 박사의 중국이야기 17 - 한국 화교, 영화와 쇠락의 변천사
  • 강원구 박사
  • 승인 2012.02.10 1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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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와 외모도 같은 사람, 그런데 중국어도 사용하면서 한국어도 전혀 막힘없이 사용하는 사람들 가운데 화교가 으뜸이다. 아예 이곳에서 태어났거나 어린 시절부터 살아온 터라 마치 한국사람과 다를 바 없다.

중국인의 냄새가 전혀 없다는 얘기다. 그들은 언제부터 한국 땅에 정착해 역사를 이루기 시작한 것은 130년을 보고 있다. 즉 1882년 임오군란 때 한국에 파견된 군대를 따라온 40여명의 상인들이 머물면서부터라고 알려져 있다.

같은 해 조선과 청나라간에 통상조약이 맺어져 화교 유입의 길이 터지자 주로 산동성 연대 출신들이 서해를 건너와 구한말 때는 서울과 인천에 약 300명 정도의 화교가 있었다.

상업을 천시했던 당시 우리나라의 풍조에 힘입어 그들은 급속도로 주변 상권을 장악했다. 1923년에는 6천 명에 이르렀으며, 1970년대는 12만 명에 이르기까지 번성했다.

대부분 대만 국적을 가진 화교들은 1992년 한중수교 이후 대만과 단교 되면서 화교사회는 척박한 한국적 풍토를 견디지 못해 쇠락의 길로 접어들었다. 청천백일기(靑天白日旗)가 내려진 것이다.

화교 학생들은 이곳에서 태어나 한국말을 잘하고 한국의 정치나 문화 역사 등을 공부하는데, 대만에 있는 일반고등학교와 똑 같은 교과과정을 이수한다.

현재 전국에 거주하고 있는 화교는 약 2만명이며, 1970년대에 비하면 너무나 줄어들었다. 주로 대도시에 몰려 살고 있으나 과거의 영화는 찾아볼 수 없다.

화교의 직업은 식당업이 주류를 이루고 중국 음식점이 전국적으로 500여 곳에 이르고 있다. 하지만 최근 변화가 일고 있다. 주역은 20~30대의 젊은층, 이들은 중국대륙을 겨냥한 무역이나 여행업에 주력하고 있다. 또 한국에 정착하기 위해 한국대학을 지원하는 학생들도 점차 늘어나고 있다.

이제 신화교들이 몰려오고 있다. 글로벌 마인드와 신지식으로 무장한 신화교는 오랜 시간 한국 땅에서 규제와 차별에 억눌려온 노화교들에게 새로운 희망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노화교는 중국음식점 경영이나 통역가이드, 한의사 등 제한적인 직업을 가진 한국 사회의 잊혀진 소수였다. 반면 신화교는 중국뿐만 아니라, 미국․영국 등에서 글로벌 교육을 받고, 한국 내에서도 정보통신․생명공학 등 최첨단 분야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노화교가 한국 땅에 뿌리를 내리고 대대손손 정착한 사람들만을 지칭했다면, 신화교는 국제화․개방화 시대에 중국인 출신으로 한국에 새롭게 진출해 일하는 사람들을 통칭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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