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근태 선배를 그리워 하며...
김근태 선배를 그리워 하며...
  • 나상기 광주전남민주화운동동지회 상임지도위원
  • 승인 2012.01.06 11:4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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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뜻한 민주주의자 김근태 선배가 우리 곁을 떠났습니다.
김근태 선배는 지난 83년 민화운동청년연합(민청련) 의장과 89년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전민련) 집행위원장을 맡아 민주화운동의 선봉에 서서 군사독재정권의 칼날에 온몸으로 맞서 싸웠습니다. 수차례의 구속과 남영동 대공분실의 고문대 칠성판에서 고문기술자 이근안의 모진 고문을 견뎌 내면서 이 땅의 민주주의 실현과 군사독재의 종식을 위해 헌신해 오셨습니다.
그래서 역사는 그를 민주화의 대부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마지막 재야 김근태는 민주주의 발전을 위한 수평적 정권교체를 실현하기 위해 지난 95년 새정치국민회의 부총재로 제도 정치에 합류하였습니다.

그래서 97년 김대중 대통령의 당선과 국민의 정부를 수립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습니다. 15대에서 17대까지 국회의원 3선을 내리 하고, 원내대표와 당의장을 역임하면서 국민의 정치지도자로 성장하였습니다. 최초로 국민경선제를 주장 관철시켜, 오늘날 국민참여경선제도를 정착시키는 등 정치혁신을 꾸준히 이뤄 냈습니다.

승자독식의 여의도 정치정글에 도전하여 패자부활전이 가능한 정치, 따뜻한 시장경제와 양극화 없는 사회를 만들려는 정책비전은 지금도 새로운 민주진보정치의 주요한 의제로서 작동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제도정치의 현실은 녹녹치 않아 원칙과 소신있는 신사다운 따뜻한 정치인 김근태 선배는 당내에서는 항상 비주류 정치인으로 어려움이 많았습니다. “당위에 군림하는 특정계보가 있다”며 동교동계의 계파를 해체하라고 촉구했지만 지금까지 계파정치는 종식되지 않고 있습니다.

정치자금을 수수했다고 양심선언을 했지만 바보 김근태로 매도되기도 하였습니다. 또한 2002년 16대 대통령선거후보 경선에 참여했으나 광주의 선택을 받지 못하고 스스로 중도사퇴하면서 노무현 후보의 당선과 참여정부 수립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습니다.

통큰 양보를 통해 대의를 위한 광주의 뜻을 수용하였습니다. 우리 광주는 그 분에게 빚을 진 셈입니다.

김근태 선배의 비주류 정치는 계보도 없고 세도 약했습니다. 명분과 원칙을 중시하고 고민하는 김근태 정치는 항상 한 템포 느렸습니다.

여의도 정글의 치열한 생존경쟁의 정치생태계에 새로운 변화의 시도가 너무 신중한 나머지 정치혁신을 가져오지 못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습니다.

그러나 한번 결정하면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번복하지 않으면서 밀어 붙이는 끈질긴 정치인이었습니다. “FTA를 통과하려면 나를 넘고 가라”고 주장하면서 국회에서 단식을 하였습니다. 노무현 대통령에게 “공공주택분양가 문제와 같은 중요한 문제들은 계급장 떼고 치열하게 논쟁하자”는 성명서를 발표하여 큰 파장을 일으켰습니다.

그의 원칙과 소신있는 정치가 얼마나 강인한가를 보여주는 한 대목이었습니다.

김근태 선배의 마지막 말씀은 “2012년을 점령하라!”였습니다.
지난 민주정부 10년 신자유주의와 양극화의 심화를 가져온 것에 대해 깊이 성찰하고 반성하면서 국민과 함께 김근태의 정신과 가치로 총선승리, 대선승리를 이룹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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