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식은 정치다
음식은 정치다
  • 이재의 나노바이오연구센터 소장
  • 승인 2011.11.21 10:23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 ‘먹거리’의 관점에서 바라본 한미FTA -
▲ 그림 = 이 민 作
서울시장, ‘음식’ 때문에 바뀌었다

‘탕평채’는 화합정치를 상징하는 음식이다. 묵청포, 미나리, 김, 돼지고기 등을 골고루 섞어 새콤한 초장에다 버무려 만드는 데 재료의 색깔은 각 붕당을 의미한다. 김의 검은색은 북인을, 미나리의 푸른색은 동인을, 청포묵의 흰색은 서인을, 고기의 붉은색은 남인을 뜻한다. 이 음식을 ‘탕평채’라고 부르자고 한 사람은 영조대왕이다. 사색당파의 파쟁 때문에 자신의 아들 사도세자를 죽게 한 비극을 겪었다. 이후 그는 인재를 고루 등용하는 탕평책을 펼쳤다.

딱딱하기 쉬운 국제정치 무대에서 음식은 대화를 여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2005년 부산에서 열린 APEC정상회담 만찬에서도 우리나라 전통음식은 그런 역할을 톡톡히 했다. 각국 정상들이 각자 가져온 자기나라 특유의 술들도 분위기를 부드럽게 하였다.

우리나라에서는 대통령이 바뀔 때마다 ‘먹거리의 정권교체’도 뒤따랐다. 대통령 출신지역 특산물이 크게 유행했다. ‘멸치’에서 ‘홍어’로, ‘도다리’에서 ‘과메기’로 인기 어종이 바뀐 것이다. 옛날이나 요즘이나 정권이 바뀌면 실세들에게 줄을 대려는 사람들은 관가나 정치권 주변 식당가로 모여든다. 광화문이나 여의도 부근 식당들은 이런 정치기류에 민감하다.

얼마 전 치러진 서울시장 선거도 핵심은 음식이었다. 학생들의 단체급식에 대한 여당과 야당의 입장차이가 정치적 운명을 갈랐다. ‘선별적 무상급식’과 ‘전원 무상급식’이 대립했다. 선별적 급식을 주장하던 한나라당 오세훈 시장이 패했다. 뒤이은 보궐선거에서 시민운동가인 박원순씨가 서울시장에 당선됐는데 전원 무상급식을 선거구호로 내세운 결과였다. 음식이 정치지형을 뿌리부터 흔들어 놓은 것이다.

식품은 생명의 원천, 일반상품과 다르다

2008년 ‘촛불시위’는 막 출범한 MB정부의 행보에 치명적인 내상을 입혔다. 광우병 감염 우려 때문에 미국산 수입쇠고기의 안전성을 둘러싸고 시작된 촛불집회가 엄청난 정치적 파장을 일으켰다. 결국 한미FTA 협정체결을 한동안 미뤄지게 하는 등 음식은 국제정치의 근간마저 뒤흔들었다.

다시 한미FTA협정이 정치일정에 올랐다. 국회비준을 둘러싸고 국론이 분열되면서 연말 정치권이 뜨겁다. 속내를 들여다보면 여전히 음식이다. 이번에는 자동차와 쇠고기가 맞붙었다. FTA로 우리나라 자동차 생산자들은 큰 이익을 본다. 반면 축산농가를 비롯한 먹거리 생산 농민들은 막심한 피해가 예상된다. 정부 여당은 ‘이익의 균형’을 맞출 수 있는 방안 마련은 소홀히 한 채 협정체결을 강행하려는 분위기다. 이를 두고 일부에서는 과거 굴욕적인 한일협정에 버금가는 매국행위라는 비난마저 일고 있다.

음식을 둘러싼 정치적 갈등의 원인은 음식을 바라보는 관점 차이 때문이다. 음식을 에너지나 자동차, IT제품 등 일반적인 상품과 동일하게 취급하는 시각이다. 음식의 대량생산과 대량소비를 통해 오로지 돈만을 목표로 하는 산업적 관점이다. 반면 음식을 일반적인 상품으로 이해하기 보다는 생명을 유지시키고, 미래세대의 재생산을 위한 생명의 필수 요소로 간주하는 사고방식이다.

이 두 측면이 대립하기 시작한 것은 20세기 후반 자본주의 대량생산이 일반화되면서부터다. 식량의 대량 생산은 인류의 꿈이었다. 1970년대 녹색혁명은 인류를 기아에서 해방시켰다. 그 결과 출산율 증가와 커다란 경제적 번영을 가져왔다. 미국 거대 농산업체도 함께 성장했다. 이들은 음식을 막대한 돈벌이 대상으로 취급했다. 20세기 후반 DNA 유전자 해독 등 생명공학의 이룩한 눈부신 성과는 이들을 크게 고무시켰다. 농수축산물에다 생명공학의 최신 성과를 접목시켜 더 큰 돈을 벌 수 있는 발판이 마련됐다. 유전자조작으로 생산되는 농산물이 바로 그런 것들이다. 게다가 신자유주의의 특징인 지적재산권 보호 강화 추세는 이들에게 독점적인 이익을 보장해 주었다. 미국은 유전자조작으로 생산된 농산물에 최초로 특허권을 인정한 나라다. 생명의 기본단위인 세포에서의 새로운 발견이나 발명에 일반 상품과 같이 특허권을 인정함으로써 배타적인 권리를 부여하였다. 그 결과 요즘 생명공학분야는 생명에 대한 권리 획득을 위한 특허 전쟁터로 바뀌었다. 우리가 매일 섭취하는 빵이나 분식, 과자류의 원료인 옥수수 밀가루 등이 바로 그 대상들이다.

혀 끝의 맛까지 지배하려는 한미FTA

미국 거대 농식품업체들의 판매 전략은 상상을 초월한다. 혀끝에서 맛을 느끼는 세포의 유전자를 분석하여 신생아 때부터 여기에 맞는 식품을 공급한다는 계획을 추진한다. 어렸을 때 익숙해진 맛에 대한 감각은 성인이 돼서도 지속된다. 이점을 노린 것이다. 현대의 각종 식품기술이 어린이들의 혀끝에서 느껴지는 입맛 길들이기를 향해 달려가고 있다. 어린이와 청소년들이 즐겨먹는 패스트푸드에는 거대 식품자본의 정교한 계산과 기술이 교묘하게 숨겨져 있다. 이들이 국내정치는 물론 국제정치를 움직인다. 후원금을 지원함으로써 정치인들이 식품업체의 지적재산권을 보호하는 법안을 만들게 한다. 또한 FTA와 같은 국제정치 이슈에서도 자신들이 만든 기준, 즉 지적재산권 보호장치를 상대국에게 강요하는 협상안이 통과될 수 있게 정치인들에게 요구한다.

미국이 우리나라에 판매하는 쇠고기에도 이런 꼼수가 숨어있다. 소고기 맛에 대해 우리나라 소비자들은 부드럽고 연한 고기, 향이 좋은 부위, 육즙이 많은 것을 우선순위로 꼽는다.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쇠고기의 품질기준이 달라졌다. ‘마블링’이라는 지방질의 함량과 분포만으로 쇠고기의 등급을 매긴다. 이는 미국 소 농장주들의 로비에 의해 만들어진 기준이다. 특히 미국산 사료 옥수수의 수출에 유리하게 정해진 국제품질기준이다. 보통 소의 경우 마블링은 등심에만 약간 있다. 그러나 미국에서는 마블링 확대를 위해 특별한 옥수수 사료를 먹여 가두어 키운 탓에 등심은 물론 다른 부위에서도 생긴다. 한마디로 소가 고지혈증에 걸려 지방질이 많아진 것이다. 소가 이런 옥수수만을 먹고 자란다는 것은 사람이 설탕만 먹고 자란 것이나 비슷하다. 하지만 미국 육우업자들이 만든 국제기준인 마블링이 잣대가 되면서 우리나라 한우고기의 신선하고 고소한 맛은 뒷전으로 밀렸다.

우리 음식에서 ‘토종의 깊은 맛’이 사라진 것도 비슷한 이유에서다. 50세 이상 우리나라 성인들이라면 어렸을 때 먹었던 쌀밥의 고소한 향기며, 고슬고슬해서 혀끝에서 살살 녹는 듯한 맛을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요즘 그런 쌀밥 먹어 보기 쉽지 않다. 쌀 자체가 별로 맛이 없다. 토종닭이 낳은 계란 맛도 양계장에서 대량생산되는 요즘 계란과 크게 차이가 난다. 왜 토종과 요즘 식품 사이에 이런 맛의 차이가 생겨났을까? 우리 선조들은 이웃집 쌀밥을 먹어보고 맛있으면 그 집에서 볍씨 종자를 얻어다 이듬해 자신의 논에다 심었다.

이런 식으로 몇 세대에 걸쳐 우리 입맛에 잘 맞는 종자를 골라 품질을 개량해왔다. 이 과정에서 자신도 모르게 우리의 혀끝에 가장 잘 어울리는 맛 유전자를 보유한 품종을 찾아낸 것이리라. 토종 식재료가 맛있는 이유다. 그러나 맛보다는 생산량만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이익 중심의 대량생산 체제가 정착되면서 토종들은 점차 자취를 감추게 됐다.

엄청난 물량공세와 생산비에도 미치지 못하는 낮은 쌀값은 맛 좋은 토종쌀이 설자리를 잃게 만들었던 것이다. 토종 참깨도 비슷한 운명을 겪었다. 식재료로 사용되는 대부분의 식물이나 동물에 대한 유전자 개량기술은 미국 등 선진국이 특허권을 확보하고 있다. 그들의 맛과 기준에 따를 수 밖에 없는 상황이다. 한미FTA협정을 둘러싼 국내 정치세력간의 갈등 구도도 그런 맥락에서 들여다보면 흥미롭다. 단순화시킨다면 먹거리 생산의 주요 거점인 농촌지역 출신이 다수 포진된 민주당이 자동차산업을 기반으로 하는 한나라당과 달리 필사적으로 한미FTA에 반대하는 이유도 그런 배경이 아닐까?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