멀리 가는 다리 5 -王이시여, 어디로 행차하시나이까?
멀리 가는 다리 5 -王이시여, 어디로 행차하시나이까?
  • 윤영숙 기자
  • 승인 2011.10.07 13:0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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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곶이다리’는 태종의 매사냥 터
정조의 사도세자능 참배길 ‘만안교’
모처럼 우리말로 이름 붙여진 다리를 찾았다. 살곶이다리다. 서울 한양대 동남쪽 후문 바로 앞 중량천(中梁川)을 가로 지르고 있다. 옛 이름은 전곡교(箭串橋)이다. 그러나 지난 7월 28일부터 정부 고시로 공식적으로 ‘서울 살곶이다리’로 바뀌었다.
처음 이 다리를 볼 때 엄청 길다는 생각이 들었다. 주변은 공원화되어 있어 많은 사람들이 운동을 즐겼고 특히 자전거 주행을 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이곳에 사는 사람들은 이 다리에 대해 별다른 의미를 못느꼈다. 그저 있는 다리려니 할 뿐이었다.
우연히 이야기를 나눈 이 지역 토박이 트럭운전기사는 “이 다리가 뭐라고 광주에서 이곳까지 구경 왔어요. 볼 것도 없는데…” 살곶이다리의 내용은 대충 알고 있었는데 이 다리가 사적 160호로 지정된 문화재적인 가치가 있는지에 대해서는 전혀 무관심이었다.
이곳은 한양과 동남지방을 연결하는 주요 통로로 사용되었다. 마치 평평한 평지를 걷는 것과 같다하여 ‘제반교(濟盤橋)’라고도 불렀다. 현존하는 조선시대 장석판교(長石板橋) 중 가장 긴 다리이다.

태종이 매사냥을 즐기던 곳

횡단으로 기둥이 4열(폭 5.4m), 종단으로 16열(길이 76.2cm)이며 모두 64개의 돌기둥으로 만들어졌다. 다리 높이는 하상에서 10척 내외이며 기둥의 높이는 4척 가량이다. 좌우의 교안(橋岸)을 장대석(長臺石)으로 쌓고 네모난 돌기둥 교각을 16개소를 세웠다. 교각의 간격은 대략 11∼13척 정도이며, 돌기둥 위를 3장의 장대석을 건너지른 다음 그 위에 다시 귀틀돌을 놓아 청판돌을 받게 한 구조이다.
기둥돌 아래에는 네모난 주초가 있고 물밑에는 주초받침돌이 주초를 받고 있으며 초석 사이에는 포석을 깔아 기초를 단단히 하였다. 따라서 물이 줄때는 이 포석 면이 드러나 마치 지금의 잠수교와 같아 '이층다리' 라고도 불렀다고 한다.
돌기둥의 모양은 마름모형으로 흐르는 물의 저항을 줄이기 위해 고안된 것이다. 교각은 4개씩 열을 지어 64개의 돌기둥을 사용했고 다리에는 일체의 난간이나 장식을 하지 않았다. 큰 혹띠기로 표면을 가공하였고 조립할 때 잔돌을 많이 사용하여 뜬 곳을 메웠으며 석난간(石欄干)은 없다. 고종 때 경복궁을 중건할 때 살곶이다리의 일부를 헐어다가 석재로 썼다하는데 확인할 수 없다.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考』에 따르면 성종 13년(1482) 한 승려가 방법을 고안하여 다리를 완공하게 되자 왕이 이를 높이 치하하고 다리가 옥우(屋宇)와 같이 평평하여 마치 평지를 걷는 것과 같다 하여 ‘제반교’라는 이름을 붙이게 했다고 한다. 한경지략(漢京識略』권2, ‘교량조(橋梁條)’에도 살곶이다리의 명칭은 제반교(濟盤橋)라 하여, 용재총화(慵齊叢話』권9의 기록을 인용하여 쓰고 있다.
이곳에 다리를 만든 것은 정종(定宗)과 태종(太宗)의 잦은 행차 때문이었다. 세종(世宗) 즉위 후 태종은 광나루에서 매사냥을 즐기고, 전곶에 있는 낙천정(樂天亭)과 풍양 이궁(豐壤離宮)에 수시로 행차하면서 살곶이의 내를 건너기 위하여 다리를 놓게 됐다는 것이다.

전국을 잇는 교통의 요충지

세종 2년(1420) 5월 상왕인 태종은 영의정 유정현, 박자청으로 하여금 공사를 담당하게 하여 석교를 세우는 일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이 일은 완공을 보지 못한 채 중단되었다. 공사의 어려움도 있었으며 또 세종 4년에 태종이 죽자 이곳을 통한 행차가 거의 없어졌기 때문이다.
여기에 세종 3년부터 시작된 도성안 개천축성공사로 인해 도성 밖의 공역까지 힘이 미치지 못하였다. 그러나 이 길을 이용하는 백성들로 인하여 살곶이다리를 만들 필요성이 제기되었고, 성종(成宗) 6년(1475) 9월 살곶이다리를 완성시킬 것을 양주목(楊州牧)에 명령하여 성종 14년(1483)에 완공했다.
1913년에 다리 상면을 콘크리트로 보수하였으며, 1920년대 서울 지방에 내린 집중호우로 다리 일부가 물에 떠내려갔다. 그 후 늘어나는 교통량에 대처하고 장마와 홍수에도 사용할 수 있는 성동교가 1938년 5월에 가설되자 이 다리는 방치되었다. 1972년에 이르러 서울시는 무너진 다리를 원래의 모습대로 복원하였는데, 하천(河川)의 폭이 원래보다 넓어져 다리 동쪽에 27m 정도를 콘크리트로 잇대어 복원함으로써 원래의 모습을 다소 잃었다.
살곶이는 중량천과 청계천이 만나는 한양대학교 개울 부근 지역을 일컫는 말이다. 조선시대에는 이곳이 넓고 풀과 버들이 무성하여 나라의 말을 먹이는 마장(馬場) 또는 군대의 열무장(閱武場)으로 사용되었던 곳이다. 따라서 살곶이다리는 조선시대 도성내 교량인 금천교(禁川橋), 수표교(水標橋)와 함께 중요한 역할을 한 다리 중의 하나였다.
이 하천을 보면 강폭이 조금 있고, 물도 깊어 보이는데 배로 건너기도, 걸어서 건너기도 애매한 지형을 하고 있어 다리에 대한 수요가 많았던 것으로 보인다. 조선시대에 강원도와 경상도 지방에서 도성인 한양으로 들어오는 아주 중요한 관문이었으며, 또한 동대문과 광희문(일명 수구문)을 나와 이 다리를 건너면 광나루로 빠져 강원도 강릉으로, 송파로 건너가 광주(廣州), 이천을 거쳐 충주로 나가는 통로였다.
또한 태종과 순조의 능인 헌릉(獻陵), 인릉(仁陵)으로 가는 길이고 성종과 중종이 모셔진 선릉(宣陵), 정릉(靖陵)에 이르게 되어 국왕이 수시로 참배하는 길이다. 또 봉은사로도 통하게 되어 있어 한양과 동남지방을 연결하는 주요 통로로 사용되던 다리이다. 그리고 대한제국의 순종황제의 국장 행렬이 금곡 유릉으로 향할 때에 이 다리를 건너기도 했다.

‘살곶이’ 그 이름엔 여러 뜻이

‘살곶이’란 다리 명칭에 관해서는 여러 의견들이 있으나 어떤 얘기가 정확한 것인지는 알 수가 없다.
첫째는 뚝섬일대가 군사훈련의 일종인 활쏘기 장소로 사용되어 화살곶이 들(전관평 箭串坪)이라 부르던 것에서 유래되었다는 설이다.
둘째는 ‘살곶이’라는 이름은 태조 이성계가 한양으로 도읍을 옮기기 전 이곳에서 매 사냥을 하는 중 새를 향해 활을 쏘자 살을 맞은 새가 중랑천 도요연에 떨어졌는데, 이 후로 새가 떨어진 곳을 ‘살곶이’ 그리고 주변 벌판(뚝섬일대)을 ‘살곶이벌’이라 부르게 되어 다리 이름도 거기에서 유래하였다는 설이 있다.
셋째는 태조7년(1398) 왕자의 난을 일으켜 계비의 두 아들과 정도전을 제거하고 새 왕이 된 태종에 대해 노여워한 태조는 함경도에 있는 별궁에 칩거하다 결국 한양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태종은 아버지 태조가 함흥에서 돌아온다는 소식에 전관평에 나와 장막을 설치하고 환영 준비를 하였다. 태종이 태조를 뵈려할 때 태조는 노기 띤 얼굴로 태종에게 활을 쏘았는데 태종은 나무 기둥에 몸을 숨겨 목숨을 부지했다고 한다. 이후 이 사건이 일어난 전관평을 가리켜 화살이 꽂힌 자'라는 ‘살곶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는 설이 있다.
넷째는 한강물과 중량천이 어우러지는 아우라지[합수(合水)]에 살곶이다리가 있다. 이 다리의 이름은 ‘물살이 세다’하여 물살의 ‘살’과 아우라지가의 흙이 쌓인 턱이 뾰족이 나왔으므로, 그 흙의 턱을 ‘곶(串)’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그러니까 ‘살곶이’는 ‘물살이 센 곳의 뾰족한 땅’이라는 뜻이 있다.

정조대왕, 사도세자 아버지 가는 길

만안교(萬安橋) 역시 조선시대에 만들어진 돌다리이다. 만안교 바로 옆에 석수교회가 눈에 띈다. e편한세상 아파트 119동이 방음벽을 넘어 바로 보인다. 이곳 만안교에서 안양역을 경유하여 명학역 부근에서 끝나는 여정을 만안로라 이름 붙여 그 역사적 의미를 담고 있다.
전철 1호선 관악역에서 1번 출구로 나와 안양역 방향으로 200미터 가량 걸어가면, 우측으로 석수교회를 지나자마자 만안교가 나타난다. 승용차를 이용하면 석수교회 가기 전 삼막교에서 골목으로 우회전해 삼막천을 따라가면 주차장이 있다.
만안교 다리 밑으로는 현재 삼막천이 흐르고 있고, 마지막 교각 밑은 자전거 도로가 이어져있어, 누구든지 쉽게 다리 밑을 지날 수 있다. 가끔 사람들이 이 다리 밑을 자연스럽게 걸어다닌다. 모래밭이어서 조금 걷기엔 불편할 텐데 말이다.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38호로 지정된 안양을 대표하는 문화재 중 하나가 ‘만안교’다. 2006년 5월 15일 건설교통부가 지정한 한국의 아름다운 길 100선 중에 들어있다. 그런데 이 근처 상가며 주민들에게 “만안교라는 돌다리가 어디 있어요”하고 물어보니 아는 사람을 찾을 수 없었다. 때마침 우체부가 지나가 그를 붙잡고 물어서 겨우 찾을 수 있었다.
정조(正祖, 1776~1800)가 아버지인 사도세자의 능을 참배하러 갈 때 필요해서 만들었다. 정조 19년(1795)에 경기관찰사 서유방이 왕명을 받아 길이 31.2m, 너비 8m에 7개의 갑문을 설치하고 그 위에 화강암 판석과 장대석(長臺石)을 깔아 완성하였다.
길이 약 30m, 폭 약 9m, 높이 약 6m이며 7개의 홍예문으로 이뤄졌다. 북쪽에서 남쪽으로 흐르는 물살을 피하기 위해 북쪽 방향으로는 삼각형의 기둥을 세웠다. 다리 남단에 건립 당시에 세운 교비가 서 있다. 축조 방식이 정교해 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홍예석교로 평가받는다.

조선 후기 대표적 홍예 석교

현륭원(顯隆園)은 조선 22대 왕 정조의 생부 사도세자의 묘이다. 원래 정조는 노량진과 동작, 과천을 지나 현륭원으로 갔다. 원래 서울에서 수원으로 가는 길은 용산에서 노량진으로 한강을 건너고 동작을 거쳐 과천으로 통하는 길이었다. 그러나 이 길에는 교량이 많고 남태령이라는 고갯길이 있어서 길을 닦고 행차하는 데 어려움이 많았다.
또한 영조(英祖)를 부추겨서 사도세자(思悼世子)를 죽음에 이르도록 한 김상로(金尙魯)형 김약로의 묘를 지나게 되므로 정조가 이를 불쾌히 여겨 현륭원으로 가는 새로운 길을 만들도록 했다. 그 길은 시흥을 거쳐 수원으로 향했다.
그 길목에 석수동 삼성천이 있어 다리를 새로이 만들었는데 그것이 바로 만안교이다. 정조는 이 다리의 편의가 만백성에게 만년 동안 편안하게 다니기를 기린다는 의미에서 ‘만안교’라고 이름 지었다고 한다. 만안교가 생기면서 넓은 대로가 되었다. 그 대로가 바로 우리나라 1번 국도이다.
정조는 수원 화산에 있는 사도세자의 묘를 자주 찾았는데, 이를 ‘화산 능행차’라고 한다. 원래 왕의 행차로에는 나무다리를 가설했다가 왕의 행차가 있은 뒤에는 바로 철거하고 행차가 있을 때에 다시 가설하는 것이 상례였다.
시흥로가 개설된 것은 정조 18년(1794)으로 첫해에는 이처럼 임시로 나무다리를 놓아 사용하였는데 다리를 놓았다 헐었다 하는 번거로움과 평상시 다리를 이용할 수 없는 백성들의 고통이 많았으므로 항구적인 돌다리를 놓게 되었던 것이다.
다리의 규모는 원래 길이 15장(약 30m), 폭 4장(약 8m), 높이 3장(약 6m)이고 홍예 수문이 5개라 하였는데, 현재는 홍예가 7개인 것으로 보아 시공 당시에 변경이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홍예는 정교하게 다듬은 장대석을 써서 반원형을 이루고 있으며, 그 위에는 장대석을 깔아 노면을 형성했다. 전체적으로 축조 양식이 매우 정교하여 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홍예 석교로 평가된다.
조선 영조 때의 <동국문헌비고(東國文獻備考)>에 “만안교는 남쪽으로 10리에 있는데 안양천에서 수원으로 통하는 대로에 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만안교보다 30여년 앞서 제작된 <여지도서(輿地圖書>에는 안양교라는 이름이 나온다. 원래의 안양교를 새로 축조하면서 만안교라고 했고, 이후로 안양교 혹은 만안교로 불렀다는 다리의 유래와 맞아떨어진다.

얼마나 통곡하며 지나갔을까?

다리를 유심히 보니 상판 양옆에 일정한 간격으로 구멍이 나 있었다. 일제강점기 때 국도1호선 도로로 사용하면서 다리 위에 콘크리트를 깔고 쇠말뚝을 박았던 난간 흔적이다. 도로로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만안교는 원래 남쪽으로 약 460m 떨어진 만안로 입구에 있었다. 1979년에 국도 확장 때 이곳으로 옮겨 복원되었다. 그런데 그 배경이 있다. 겉으론 경부국도의 교통량 증가로 국도 확장이 이유였지만 당시 언론의 질책 때문이었다는 것이다.
안양시청 문화유산팀 김지석씨는 “당시 한 신문에서 정조대왕이 만든 다리가 콘크리트로 뒤덮였고 다리 밑까지 모래가 가득 차는 등 관리가 소홀하다는 지적을 해 문화유산 보호 차원에서 근처로 옮긴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을 기록한 원행을묘정리의궤(園幸乙卯整理儀軌)에 따르면 정조의 행차길에 동행한 사람은 1807명이고 말이 796필이다. 또 이 행차의 전 과정에 동원된 사람은 5661명, 말이 1417필이었다고 한다.
정조가 아버지 사도세자를 만나러 갈 때마다 이 길을 지나며 얼굴을 보이진 않았지만 속을 삭히며 얼마나 통곡하고 눈물을 흘렸을까 상상해본다. 이런 행차는 정조 즉위 기간 동안 12차례에 걸쳐 이뤄졌다.
정조가 만안교를 지나기 시작한 것은 12번 능행차중 7번째 능행부터이다. 행차 때마다 수백에서 수천 명에 이르는 ‘화산 능행차’를 위해 지나는 길목마다 나무를 심고 다리를 놨으며 왕의 숙박을 위해 ‘행궁’을 지었다.
다리 남쪽 측면에 축조 당시에 세운 비석이 있다. 이 비문은 서유방이 글을 짓고 조윤형(曺允亨)이 썼다고 알려져 있다. 이 비는 귀부와 비신(비문을 새긴 비석의 몸체), 가첨석(지붕돌)을 갖춘 조선 후기의 전형적인 석비 양식을 보여주고 있다.
귀부를 보니 얼굴은 거북이나 용의 머리가 아닌 것 같다. 툭 튀어나온 눈, 양쪽으로 나온 이빨, 둥글둥글한 코 등을 보니 상상의 동물을 과장되게 표현하여 사악한 기운으로부터 비신을 보호하려는 의도라고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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