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 민주화운동과 민중미술
5.18 민주화운동과 민중미술
  • 오병희/광주시립미술관 학예연구사
  • 승인 2011.09.07 09:32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일반적으로 민중미술의 시작을 대중과의 소통을 통한 열린 미술을 중시한 1979년 ‘현실과 발언’의 창립으로 본다.

이에 대해 최열은 ‘현실과 발언’이 미술내부 활동에서 벗어나지 못했으나 5.18민주화운동을 계승한 ‘광주자유미술인연합회’는 조직적 연대를 통해 사회적 참여와 활동을 하여 ‘광주자유미술인연합회’를 민중미술의 시작으로 보아야 한다고 보았다.

민중미술이 사회적 화두가 된 사건은 1985년 ‘20대의 힘’전이 열린 아랍미술관에 경찰들이 난입하여 작가를 구속하고 작품을 압수하고 전시장을 폐쇄시킨 사건이다.

이를 계기로 민중미술 작가들의 산발적인 활동을 조직적으로 하기 위해 민미협을 창립하였다. 1980년대 후반기에 서울을 중심으로 진보적인 젊은 작가와 기성작가들 간에 대립적인 구도가 나타나 민미협을 비판하고 민중미술운동연합(민미련)이 1988년에 출범하게 된다.

민미련은 현장중심의 벽화, 걸개그림, 만화, 전단지 등 적극적인 형태로 집회 현장에서 영향력을 발휘 하였으나 1993년 해단되었다.

이후 민중미술은 여러 진영으로 분리된 상황에서 작품의 형식과 민족과 민중적 주제를 두고 치열한 논쟁을 벌이기도 하며 1990년대를 보내게 된다.

1980년 5월 군사 독재의 종식과 민주 정부에 대한 열망을 요구 한 5.18민주화운동이 일어났으나 군부는 총칼로 무자비하게 탄압하였다.

5.18 민주화운동이후 군사독재 종식과 민주주의 정부 수립 통일을 외치는 학생 시민운동이 활발해진다. 1980년 5월 광주 민주 항쟁 기간 동안 청년학생들이 중심이 된 등불 야학팀이나 극단 광대팀 등이 선전대 역할을 하였다.

플래카드를 제작하고 차량이나 길바닥, 벽면 등에 구호를 쓰는 작업에 참여하였고 항쟁기간 동안 <투사회보>를 만들고 대자보를 작성하여 광주의 현실을 알렸다.

역사의 감춰진 사실을 폭로하고 투쟁대상이 가시화됨에 따라 소극적인 연대관계를 탈피하여 체제 변혁을 위한 투쟁형태로 조직화하고 창작 활동을 구체화시켰다.

1980년 5월을 체험한 젊은 청년미술인을 중심으로 미술계는 실천운동이 비약적으로 발전하게 된다. 1979년 8월 결성된 광주자유미술인연합회는 1980년 5월경 창립전을 가질 예정이었으나 무산되고 1980년 7월에 남평 드들강변에서 5월 영령을 위한 진혼굿 형식의 ‘야외 작품전’을 열었다.

1980년대 이후에는 목판화와 걸개그림을 통한 미술대중화가 이루어졌다. 홍성담, 김경주, 조진호 등은 목판화 작품을 사회운동에 활용하였으며 1980년대 민족민중운동의 큰 성과인 걸개그림과 더불어 깃발, 벽보, 플래카드 등을 이용하여 대중 집회에서 큰 효과를 보았다.

1989년 제1회 5월제 기간에 시각매체연구소가 ‘5월 미술전’을 열었다. 여기에서 한국 근현대사를 민중사적 관점에서 형상화한 대형 걸개그림 <민족해방사>가 금남로에 전시되었다.

1990년에 시각매체연구소와 전남대, 조선대 미대생들이 함께 참여하여 기념탑 제작, 조각전, 주제전 개최, 대형벽화 <광주민중항쟁도> 등 다채로운 미술행사를 열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강연균, 홍성담, 나상옥 등의 작가가 5월 미술을 상징하는 미술가로 부각되었다.

1980년 5월 광주를 경험한 미술인들은 현실 참여적이고 시대정신을 넣은 광주만이 가질 수 있는 남도 민중미술을 그린 것으로 그 의의가 새롭게 조명되어야 할 것이다.
최신 HOT 뉴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