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주의를 찾아서(1)
민주주의를 찾아서(1)
  • 이홍길 광주민주동지회회장
  • 승인 2011.08.29 10:3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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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젊은 날, 「정의는 힘을 가져야 하고 힘은 정의로워야 한다」는 모택동의 지적은 분명 별로 새로울 것도 없는 자명한 이치임에도 불구하고 심금을 울렸지만 그의 정의는 그만의 것이었다.

피에로의 빨간 코는 자라는 어린이들에게 기쁨을 주기위한 분장이지만, 모택동의 현란한 수사나 한국적 민주주의를 표방한 10월 유신은 독재자의 영구집권을 위한 역사 희화 극으로 무소불위의 긴급조치라는 철퇴를 들고 대한민국 국민 앞에 군림하였다.

“유신만이 살길이다”를 다짐하면서 국민교육헌장을 줄줄이 외워 조국의 국적을 새로 찾는 애국의 쓰나미가 독재자와 그 번견들에 의해 자행되고 있던 70년대 중반, 한국전쟁 이후 이승만 독재의 격랑을 4‧19혁명으로 타고 넘어, 이제 민주공화국의 참모습을 추스르려는 찰나, 반공민주의 혁명공약으로 경력을 은폐한 장군은 민정이양을 철석같이 약속하여 우리 모두를 기만하더니만, 그의 동포들에게 긴급조치의 재갈을 물리는 데에까지 오고 말았다.

보통 사람들은 차마 하지 못하는 모든 일들을 막무가내로 해버리는 데에 그의 위대성이 있었을까 아니면 “제왕은 부끄럼이 없다”는 군왕론을 시대를 거슬러서 사용했을까는 아직도 모르겠다.

유신의 철벽으로 꽁꽁 막힌 현실에서 “동해의 고래잡이”도 용이하지 않고 명태 안주로 가난한 시인 흉내를 내보아도 기갈이 풀리지 않을 때, 이영희 교수의 「전환시대의 논리」 「이성과 우상」 「8억 인과의 대화」는 이 땅의 청년학생들에게 그래도 우리들에게 미래가 있다는 사실을 일깨워 주고 폭압으로 구조된 현실이 결코 절대적이 아님을 귀띔해 주었다.

이 땅의 유신시기는 중화인민공화국의 문혁후기에 해당하는 시기였다. 우리의 삶과 우리의 현실인데도 긴급조치의 철퇴로 보지 못하게 말하지 못하게 할 때, 이영희 교수는 「8억 인과의 대화」를 편역해서, 그것도 창작과 비평사 출판으로 문화대혁명의 중국을 소개하였다.


기갈이 들린 청년학생들에게는 탁수라도 마다하지 않을 판에 청수가 펄펄 넘친다는 옆집의 현실은 얼마나 부러운 것이었겠는가를 상상해보자.

이 교수는 안내하는 글에서 “이 책은 현대중국을 <있는 사실, 그대로> 알고 싶어 하는 이를 위해서, 서방세계 저명인사들의 현지체험과 기행문을 모아 번역하고 편집한 것”이라고 소개하고 있는데 모두가 중국대륙의 현지체험의 글로 대체로 문화대혁명을 긍정하고 있었다. 이영희 교수가 직접 쓴 글은 한편도 없었지만 그의 위신과 양식이 후광이 되어 그 정보의 진실성을 의심할 나위 없게 했다.


필자는 80년대 초반 대만을 여행하는 어느 케나다의 학자가 중국과 대만의 민주화를 위하여 그 일생을 바친 대만대학교 철학과 교수 <은해광>이 민주화로 대만의 미래를 진단한 것은 잘못 본 것이라는 지적을 보고, 그냥 외국학자의 견해이거니 하고 치부하기 보다는 40대 초반의 교수답게 길길이 분노한 적이 있었다.

당시 대만은 장개석의 독재로 인민 주권이 차단당하고 있었다. 권력자에게 아첨하는 관광객적 인식이 얼마나 방자하고 당해국가의 인민에게 모욕적인가를 실감하였다.

우리나라의 유신시절에도 <허만 칸>이라는 미래학자가 한국과 청와대를 들락거리면서 유신을 정당화시키는 작태가 있었고 중화민국의 초창기, 민국을 절취한 원세개가 중국을 군주국으로 복고하는 음모를 꾸밀 때, 콜롬비아 대학교수 <굿나우>는 “중국은 공화제가 맞지 않다”는 주장으로 원세계의 테리어 노릇을 했다.

이영희 교수는 분명 「8억 인과의 대화」를 통해서 한국의 청년학생들에게 희망을 준 프로메테우스였지만 그가 시사한 전망은 그렇지 못한 것이 그가 소개한 사람들은 저명인사일망정 관광객에 불과했다. 문화대혁명은 동란이었고, 중국의 비극으로 결코 긍정적일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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