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료산업<2>감성 마케팅의 키워드 ‘향기’
향료산업<2>감성 마케팅의 키워드 ‘향기’
  • 이재의
  • 승인 2011.08.26 1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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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기업 L사의 ‘감성공학 연구팀’은 차세대 에어컨 개발을 의뢰받았다. 소비자들의 에어컨 구매트렌드를 조사했다. ‘설악산 바람’을 가장 선호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설악산의 상쾌한 바람을 앞으로 개발하는 에어컨에 집어넣기로 했다. 연구팀은 바람을 분석하기 위한 각종 측정 장비를 가지고 설악산 계곡으로 들어갔다.

계곡에서 부는 바람은 방향과 세기가 일정하지 않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또한 상쾌함의 실체가 설악산에 자생하는 구상나무의 피톤치드가 뿜어내는 향긋한 느낌이라는 점도 찾아냈다. 당장 구상나무 피톤치드 천연향을 추출하여 적당하게 조향한 결과 계곡에서와 비슷한 상쾌함을 느낄 수 있었다.

이를 에어컨 컨셉 디자인에 반영하였다. 예상대로 이 에어컨은 소비자들로부터 큰 호평을 받아 날개 돋친 듯 팔렸다. 이렇듯 향기는 매우 다양한 얼굴로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생활 전반에 깊숙이 스며들고 있다.

이제 소비자들은 어떤 제품이건 고유 ‘기능’은 차이가 별로 크지 않다고 생각한다. ‘기능’보다 자신이 선호하는 ‘감성’으로 제품을 선택하는 추세다. 제품에 ‘감성’을 구현하기 위해 시각디자인이 중요하다는 사실은 꽤 오래전부터 강조돼왔었다.

그러나 요즘은 한 단계 더 나아가 ‘향기’가 중요한 요소로 등장하고 있는 것이다. 도심의 골목길 커피점에서 나는 구수한 커피향, 갓 구운 빵 냄새는 식욕을 자극한다. 백화점의 의류나 전자제품 등 각종 매장에서도 제품뿐만 아니라 분위기에 맞는 향을 적당량 실내 공기에 뿜어주면 매출성과가 훨씬 향상된다. 바야흐로 ‘향기마케팅’이 각광받고 있는 것이다.

천연향료는 합성향료에 비해 생산, 품질, 보관, 유통, 제품화 등 모든 점에서 불리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천연향료산업에 관심을 갖는다. 그 이유는 최근 소비자들의 관심이 합성 향보다는 천연향에 쏠리고 있다는 점 때문만은 아니다.

우리나라의 기술력이나 산업구조에 대한 적합성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 천연향료가 중요하기 때문이다. 화학물질을 이용한 합성향은 고도의 정밀화학기술이 축적된 바탕에서만 가능하다. 샤넬 등 서구의 몇몇 거대 다국적기업들이 이미 이 분야에 대한 기술을 거의 선점한 상태다. 오랜 전통을 가진 향수업체들의 합성향에 대한 기술 장벽은 매우 높다.

그러나 천연향은 이야기가 다르다. 천연향은 그 지역에서 재배되는 식물자원 등 자연환경에 대한 의존성이 크다. 전라도에만 자생하거나 재배가 가능한 향기식물, 우리 지역에서 즐겨 사용해 비중이 커져간다.

라면만 해도 무려 200여종에 이를 만큼 맛의 차이에 따라 다양한 제품들이 쏟아져 나온다. ‘맛’을 찾기 위해 새로운 향미 식재료를 얻으려는 노력은 끊임없이 이어진다. 식향소재는 식품의 완성도를 높여 주는 가장 민감한 잣대로 점점 더 중요한 요소가 돼 가고 있다.
풍부한 ‘식향소재’ 특화산업으로 육성 필요

그렇다면 전라도에서 향료산업을 발전시킬 수 있는 객관적인 환경과 가능성은 어느 정도일까? 최근 전남도는 이화여대 김영선 교수팀에게 향산업 육성 가능성을 파악하기 위해 연구용역을 의뢰하였다. 연구 결과에 따르면 전라도에는 144종의 비교적 풍부한 자생 향료식물자원이 분포해 있기 때문에 산업화 가능성은 매우 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식물로부터 정유를 추출하여 화장품이나 식향의 원료로 가공하는 제조회사는 거의 없다. 김교수에 따르면 전라도의 경우 만약 굳이 향수(fragrance)와 식향(flavor) 두 가지 가운데 어느 한쪽을 선택하여 육성한다면 ‘식향’에 집중하는 편이 더 유리할 것이라는 진단이다.

산업화가 가능하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요소들이 고려돼야 한다. 식물자원의 향기성분 포함정도를 의미하는 방향성, 재배면적, 원재료 확보가능성, 정유 가공수율 및 기술력, 가격경쟁력, 수익창출 가능성 등을 검토해보아야 한다.

도내 생산 향료자원 중 편백, 화백, 소나무, 유자 등이 우선적으로 산업화 대상식물로 꼽힌다. 위 식물들은 자생면적이 넓고 수량이 많기 때문에 원료 고갈 염려가 거의 없다. 다른 수종에 비해서도 정유 수율이 높은 편이어서 가격경쟁력도 충분할 것으로 기대된다. 또한 다년생 초본류인 ‘산국’도 가능성이 높다.

우리나라 토종으로 향이 강한데다 번식이 용이하고, 피부 항균력도 있다. 케모마일 등 기존 서구의 향료를 대체할 수 있는 고부가가치 유용향료자원이 될 수도 있다는 얘기다. 현재 산국은 보성군 문덕 일부지역 약 5ha 정도 집단재배하고 있다. 전라도 전역에 걸쳐 야산에도 자생하고 있다. 만약 본격적인 산업화가 추진된다면 대량으로 집단재배도 가능하다.

유자는 이미 고흥에서 집단재배가 이뤄지고 있다. 하지만 작황에 따라 해마다 가격 편차가 커서 생산농민들이 애를 먹고 있는 실정이다. 만약 식향 재료나 화장품 소재로 본격 개발된다면 유럽 등지에서 인기를 끌고 있는 레몬 등 시트론계열의 향료시장도 파고 들 수 있을 것으로 전문가들은 내다보고 있다.

장성, 장흥 등지에 널리 분포돼 있는 편백은 최근 피톤치드의 탁월한 치유효과가 알려지면서 각광받고 있다. 필자가 몸담고 있는 장성 나노바이오연구센터는 편백 피톤치드에 대한 연구를 본격적으로 진행하고 있다. 향 뿐 아니라 피톤치드의 강력한 항균력을 활용하여 속옷 섬유, 가축용 천연항생제, 건축용 친환경접착제, 아토피용 화장품 소재 등 다양한 개발을 추진하고 있다.

‘식향’ 자원은 전남이 전국 최고다. 식향의 원료인 조미채소의 집산지다. 향미소재로 가공 가능성이 높은 마늘, 양파, 파, 고추, 생강 등 조미채소 생산량이 연간 1백만kg으로 전국의 42%를 차지하여 2위인 경남의 20%보다 2배 이상 높다. 특히 양파와 파는 전국 물량의 절반 가량을 전남에서 생산한다. 이들 조미채소를 천연향미소재로 본격 가공한다면 음료, 과자, 제빵, 라면 등 인스턴트 식품류에 사용되고 있는 해외수입 향미소재의 상당부분을 대체할 수도 있을 것으로 전망된다.

최근 천연소재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기업들은 고급 가공기술로 제품을 차별화하려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가령 향미소재의 식감과 보존성을 높이기 위해 나노캡슐화 기술이 각광받고 있는데 나노센터는 이와 관련된 기술도 개발할 예정이다.

식품소재를 나노입자로 만들거나 캡슐을 나노크기로 만들면 표면장력이 커지고 면적이 매우 넓어진다. 나노입자로 가공되면 동일한 분량의 첨가물로도 훨씬 더 강한 식감을 느낄 수 있고, 식품이 변질되지 않고 보관되는 시간도 길어진다. 이같이 식품에 나노기술을 적용하려는 노력은 식품산업에 획기적인 변화를 가져올 것으로 예측된다.

농산물 소재를 고부가가치화

그렇다면 이렇듯 경쟁력 있는 자원이 적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왜 우리지역 생산농민들은 항상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일까? 그 원인은 크게 두 가지다.

첫째는 우리나라 식품산업의 공급사슬이 붕괴됐기 때문이다. 우리가 마트에서 거의 매일 사서 먹는 가공식품의 소재가 대부분 외국 수입산이다. 우리 농산물 가격이 상대적으로 비싸서도 그렇겠지만 그보다 더 큰 이유는 식품소재산업이 발달하지 못하고 낙후된 상태로 방치돼 있는 데서 비롯된다.

둘째는 정부의 의지부족이다. 생명산업인 농업을 지켜내기 위한 적극적인 대책이 거의 없었다. FTA협상과정을 지켜보면 짐작할 수 있지만 지금도 농업의 완전 붕괴가 우려되는 데도 불구하고 먼저 대책을 마련하라는 농민들의 요구에 대해 손을 놓고 있는 실정이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향미소재산업과 같이 경쟁력 있는 분야를 선별해서 특단의 지원책을 마련해야 한다. 이를 위해 서둘러야 할 점은 우리 농산물 원료가 가공식품의 소재로 사용될 수 있도록 국내에서 식품소재산업을 발전시켜야 한다. 농도인 전라도에서 향미소재산업을 발전시켜야 하는 당위성과 현실은 바로 이점에 있는 것이다.

이웃한 전라북도는 식품산업을, 제주도는 화장품 등 코스메틱산업을 지역전략산업으로 발전시키고 있다. 전남은 이들에게 천연바이오소재, 특히 고품질의 향료소재를 공급함으로써 지역간 산업간 연결 사슬을 튼튼하게 할 수 있는 잇점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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