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대와 헤게모니(4)
연대와 헤게모니(4)
  • 이홍길/광주민주동지회회장
  • 승인 2011.06.10 1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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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홍길/전남대 명예교수광주·전남 민주동지회회장

연아 용공의 제1차 국공합작의 파탄에도 불구하고 장개석 국민당은 북벌을 단행하여 북중국을 아우르고, 만주의 장학량까지 중앙에 귀부함으로써 형식상 중국 통일을 달성하였다.

그러나 엉성하게 이루어진 통일을 완성하고 공고히 하기 위해서는 안으로는 공산당을 토벌해야 했고 밖으로는 일본의 새로운 침략을 막아내야 했다. 공산당 토벌은 전국적 범위로 이루어져 중공은 소위 대장정이라는 대패주 끝에 북중국의 연안에 칩거하게 되어, 장개석 정부의 승리가 목전에 다다른 것 같은 시점에, 9‧18사변을 계기로 일본의 대대적인 침략이 전개되었다.

공산당 토벌과 일본의 침략을 막는 두 개의 전쟁을 동시에 수행하기에는 장개석의 남경정부로서는 역불급이었다.
장개석의 남경정부는 “먼저 국내를 안정시킨 후에 밖의 침략을 무찌른다.”는 「선안내 후양외」정책으로 총괄하여 공산당 토벌에 매진코자 하였다.

그러나 중국인들의 국민감정과 장개석의 경쟁자들의 판단은 달랐다. 무엇보다도 항일이 먼저였다. 나라와 민족의 운명이 백척간두에 놓였는데, 침략자를 뒷전에 두고 단지 공산당을 한다는 이유로 동포를 살육하고 사지에 몰아넣는 것은 상식수준의 국민감정으로도 용납할 수 없는 것이었다. 아편전쟁 이후 백년 가까이 외세에 농락당한 중국. 청일전쟁으로 중국의 위신을 여지없이 짓밟은 일본에게는 무한정 양보하면서, 제국주의를 몰아내고 군벌을 타도하기 위해 함께 북벌에 나섰던 어제의 동지를 필사적으로 토벌하는 것은 결코 당위도 아니고 명분도 없었다.

공산당을 아무리 나쁘다고 선전하여도 중국인들은 공산당의 통치경험을 갖은 러시아 사람들이 아니었다. 토지소유의 모순이 중중한 나라에서 토지를 고루 나누어주겠다고 약속하는 혁명적 노동자이자 혁명적 농민들이 바로 공산당이었다. 반공은 권력자들과 기득권자들만 실감할 수 있는 것이었다.
1935년 12월 9일, 북경의 학생들은 대규모의 항일을 청원하고 상해의 문화계 인사들은 「항일 구국회」를 결성하여 영토와 주권을 수호할 것을 주장하였다.

1936년 5월 「전국 학생구국 연합회」가 성립되어 내전을 정지하고 일치하여 항일할 것을 요구하였다. 광서 광동에 웅거하고 있던 이종인 장군과 진제당장군이 항일의 이름으로 그 군대를 북상하여 상해등지의 항일운동에 호응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경정부는 일본의 협박을 접수하여 「긴급치안법령」을 반포하여 항일운동을 금지하고 항일단체를 해산하고 항일선전을 못하게 하였다. 더욱이 항일구국회의 七君子를 체포하는 등 항일 민심을 자극한 결과, 1936년 12월 12일 서안사변이 일어나 공산당 토벌을 독촉하기 위해 서안에 온 장개석을 장학량이 연금하는 병간이 일어나기에 이르렀다.

 장학량은 항일학생과 항일인사 및 항일정파의 주장을 수렴하여 국민정부가 각당 각파를 용납하여 공동구국에 나서서 일체내전을 정지하고 애국영수들과 정치범을 석방하고 민중의 애국운동을 자유롭게 개방하도록 요구하였고 장개석은 이를 수용하여 항일 연합전선의 단초가 이루어지게 되었다.
7‧7사변 후 남경정부는 항일을 선언하고 중공은 삼민주의를 위해 분투하고 국민당 전복의 폭동을 정지, 소비에트 정부를 취소하고 홍군을 국민혁명군으로 개편키로 하여 국민정부 군사위원회의 통수를 받아들이기로 하는 등 항일 연합전선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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