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대와 헤게모니(2)
연대와 헤게모니(2)
  • 이홍길/광주민주동지회회장
  • 승인 2011.05.30 15:23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이홍길/전남대 명예교수광주·전남 민주동지회회장

객관적 역사가 어떻게 변천해 왔는가 하는 것과는 상관없이 중국 공산당이 영도하는 중화인민 공화국이G2국가로 성장했다는 사실을 못 견뎌 하는 사람들이 있다. 더욱이 손문처럼 위대한 혁명가가 러시아와 연대하고 비록 개인자격일 망정 공산당원들을 국민당에 입당시킨 사실이 더 할 수 없이 서운한 것은 비단 국민당 당사를 연구하는 사람들만이 아니다.

반공을 국시의 제일의로 삼았던 친일의 잔여세력과 쿠데타 졸도들은 이웃나라 일에도 앙앙불락이다. 중국 국민당이 소련과 제휴하지 않고 공산당원들을 국민당에 입당시키지 않았더라면 중국이 공산화되지 않았을 것이고, 우리도 남북분단이 되지 않았을 것인데를 연발하면서 통일조국을 기구하는 모습은 상상만 해보아도 너무나 너무나 애국적이다.

그러나 피압박의 중국 현실은 어디까지나 중국인들이 타개해야 하는 현실로 어떤 강대국도 돌아보지 않을 때, 혁명가 손문은 국제사회에서 천덕꾸러기로 상가 집 개와 같은 신세였다. 기왕의 열강은 모두 빈사의 중국을 잡아먹고자하는 승냥이로 그 몰락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때 공산혁명을 달성한 러시아가 보내는 너무나 달콤한 밀어. 1918년 1월 소비에트 중앙집행위원회는 “노동과 피압박 인민권리선언”을 통과시킨 다음날, 러시아의 신문은 “아시아의 각 식민지 및 약소국가의 수수만만의 노동군중을 노예처럼 부려 소수국가의 복리를 조성하는 야만정책은 완전히 해제해야 한다.”고 발표하고 이어 “치체린 선언”을 통하여 이전 러시아제국이 중국에 갖고 있었던 일체의 이익과 권리를 포기할 것을 선언하였다.

국제적으로 고립무원한 중국과 중국인에게 있어서 이보다 더한 복음이 있겠는가를 상기해 보자. 이후 베르사이유 강화조약에서 윌슨의 민족 자결원칙에 감격하고 고무되어 한국과 중국에서 3․1운동과 5․4운동이 일어난 저간의 사정을 감안하면 치체린의 선언은 구체적이고 실제적이어서, 그것을 소련의 심리전술이라고 모함을 해도 중국인들의 마음을 충분히 사로잡을 수 있는 것이었다.

 이어서 카라한 선언을 발표하여 불평등조약과 특권을 포기 선언하였다. 이러한 나라와 연대하지 않으면 어떤 나라와 연대할 것인가! 소련은 중국인들의 동정심을 사게 되고 열강에 대한 반감은 더욱 증가하여 연아의 심리 역량을 제고하였다.

소련은 1918년부터 1921년 사이에 시행한 군사공산주의를 중단하고 신경제정책을 실행하여 자유경작과 자유시장을 회복함으로써 공산주의에 대한 의구심을 해소할 수 있어 삼민주의 이론가 손문의 공산주의에 대한 친애감을 확보하였다. 손문은 남방혁명정부에 대한 유일한 원조 가능국가는 소비에트뿐이라고 그의 우인에게 이무렵 술회하고 있었다.

국민혁명을 위하여 러시아와 연대를 이룩한 손문은 국내적으로 국민혁명의 조직 진용을 확대해야 했는데 5․4운동세력의 정치혁명 세력인 공산당을 신생 혁명역량으로 수혈하게 되었는데, 공산당과 국민당 사이의 조화와 갈등이라는 새로운 문제를 안게 되었다.

개인 자격으로 국민당에 입당한 젊은 공산당원들은 종국적 충성의 방향을 결정해야 했는데 그들의 공산당에 대한 신뢰와 귀속감이 쉽사리 극복되는 것은 아니었다. 공산당은 이미 세계사적 가치체계로 세계혁명을 주도하는 정치세력으로 인류역사의 제모순을 일거에 해결하고 민족과 민중의 전도에 해방의 광명 대도를 마련하는 것처럼 인식되어, 민생주의를 공산주의로, 공산주의를 민생주의로 인식하여 의식상의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그러나 그 조화는 한시적일 수밖에 없었다.


최신 HOT 뉴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