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인했던 1991년의 아픔, 오열보다 깊은 한숨...
잔인했던 1991년의 아픔, 오열보다 깊은 한숨...
  • 편수민 기자
  • 승인 2011.05.23 17:4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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故박승희 열사의 어머니, 이양순씨


1991년, 독재정권에 항거했던 12명의 빛나는 청춘들이 뜨거운 불길 속에 아스라 졌다.
20년 전 그날은 잔인했다. 갓 스물의 박승희 열사도 화염 속에 여린 몸을 맡기며 독재에 대항했다. 당시 박 열사의 분신 이후 20여일 동안 딸의 병상을 고통스럽게 지켜봤으며, 딸에 대한 기억과 추억 속에 회한의 20년을 보낸 열사의 어머니, 이양순(66)씨를 만났다.

5월 16일에 박승희 열사를 기리는 추모 20주기 행사가 전남대 일원에서 열리는 동안 어머니는 비교적 담담한 모습으로 행사의 전 과정에 참여했다. 얼굴에 드리워진 침통함을 차마 다 가리지는 못했으나 비교적 밝은 모습이었다.

 



1991년, 분신정국과 시대의 아픔

분신이란, 말 그대로 자기 몸을 스스로 불사름을 이른다. 현재에도 분신자살은 엄청난 뉴스거리 일진대, 1991년 그해에는 무려 12명의 피 끓는 청춘들이 불꽃의 화염 속에 유명을 달리했다.
그해 4월, 대학 3학년이던 강경대 열사 치사사건 이후 당시 사회는 잇따른 분신으로 홍역을 앓았다. 강경대 열사가 백골단에 의해 폭행치사 당한 이후 4월 29일 박승희 열사가 전남대 교정에서 분신했다.

5월 1일 김영균, 3일 천세용, 8일 김기설, 10일 윤용하, 18일 이정순, 김철수, 22일 정상순 열사의 분신이 이어졌고, 5월 6일에는 박창수 열사가 의문의 살해를 당했다. 그리고 25일 김귀정 열사가 집회 도중 구타로 인해 살해당했다.
8월18일 분신 후 투신한 손석용 열사를 제외하고는 4월과 5월 2달에 걸쳐 사나흘에 한 번꼴로 분신과 투신이 이어졌고 모두 사망했다.

최악의 사건이든 최상의 기쁨의 날이든 시간이 지나면 모든 것은 기억 속에서 사라지게 마련이다. 그러나 부모가 세상을 떠나면 땅에 묻지만 자식이 죽으면 가슴에 묻는다고 했다.
그만큼 자식을 떠나보낸 기억은 잊혀지지 않고 너무나 고통스러워 잊은 척 덮고 사는 것이리라.

가슴속에 깊게 패인 회한의 흉터

故박승희 열사의 부모님


이양순씨는 현재 목포에 거주하며 오월 어머니집 회원 등으로 활동하고 있었다. 직접 만나본 그녀는 사진 찍기를 부끄러워하고 손자 자랑을 수줍게 하는 평범한 우리네 어머니였다.

그런 그녀에게 박승희 열사에 대해 조심스럽게 물었다. 어머니는 기억 속 딸을 회상하며 천천히 대답해주었다. “승희는 위로 언니가 있고 밑으로 남동생이 있는데, 착해서 유독 어릴 때부터 주위 어른들의 귀여움을 받았고 싫어하는 사람이 없었다”면서 “고3 때 전교조 활동을 시작해 대학에 못 갈 줄 알았는데, 주위 선생님들이 많이 도와줘서 전남대에 입학했다”고 말했다.

어머니의 눈에 박승희 열사는 한없이 여리고 착했지만 강단 있고 자기 소신이 강한 딸이었다. 대학 시절 시위하는 모습이 TV방송에 보도되어 할아버지가 휴학을 종용했으나 열사의 의지에 부딪혀 뜻을 이루지 못했다고 한다.
초연한 모습으로 인터뷰를 시작했지만 막상 딸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하자 침묵과 한숨이 나왔다. 오열보다 깊고 슬픈 한숨으로 그녀가 숨기려했던 옛 상처의 깊은 흉터가 느껴졌다.
세월의 풍화 속에 터질듯한 오열은 깊은 한숨으로 바뀌었지만 뼈아픈 기억임에는 분명했다.

무거워진 분위기를 전환키 위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꺼냈는데 오히려 더 회환이 밀려왔는지 끝내 눈가가 촉촉해져 손에 쥔 행사용 흰 장갑으로 눈물을 훔쳤다.
20년 전 그날에는 오열하고 크게 소리라도 내지를 수 있었는데, 지금은 차마 그러지 못하고 조용히 눈물로 삭히는 박승희 열사 어머니의 모습이 애처로웠다.

딸에 대한 안타까움과 그리움

열사라는 칭호를 얻고 겨레의 딸이라 불리어지며 20년이 지난 지금까지 회자되고 있는 박승희 열사지만, 그 어머니에게는 꽃다운 스물에 저버리고 만 안타깝고도 아까운 딸일 뿐이다.
이양순씨는 추모식 동안 내내 변주현씨(바우미 광주전남아트센터 센터장)와 손을 맞붙잡고 있었다. 변 센터장은 박승희 열사와 고등학교 때부터 절친했던 사이로 박승희정신계승사업회 회원으로 열사를 기리는 많은 사업을 벌여왔다.
어머니는 그에게 고마운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박승희 열사가 살아있었다면 변씨와 같은 나이였을 것이다.

박 열사는 노래도 잘 부르고 글도 잘 썼다고 한다. 분신이라는 극단적인 선택을 하지 않았더라면 작가로 활동할 수도 있었을 테고, 사회활동가로 활동을 하고 있었을 수도 있을 터 였다. 다재다능하고 가능성 많았던 딸의 죽음 앞에서의 그 참담함을 어찌 이루 말하리.

이날 박승희 열사에 대한 추모 영상 시사회가 있었다. 그 영상에 비춰진 어머니는 커다란 유리액자 속 박승희 열사의 사진을 몇 번이고 문지르며 “나는 이 방에서 우리 승희와 같이 살아요”라며 “승희랑 이야기도 하고 이 방에서 함께 잠들어요”라고 말했다.
사진 속 박승희 열사는 그런 어머니를 향해서 환하게 웃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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