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의 3.15의거, ‘민주주의 장송데모’
마산보다 3시간 앞서
광주의 3.15의거, ‘민주주의 장송데모’
마산보다 3시간 앞서
  • 박용구 기자
  • 승인 2011.03.14 09:5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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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9 유공자 조계현씨 제보

 

동아일보 1960년 3월16일자 보도내용
1960년 3월 15일 광주에서는 부정선거를 규탄한 전국 최초의 저항이 있었다. ‘민주주의 장송데모’가 바로 그것. 분명 역사적 사실이지만 기억되지 못하는 아픔을 겪고 있다.

3.15의거하면 먼저 마산과 김주열 열사를 떠올리지만 그보다 약 3시간 먼저 일어났던 광주의 ‘민주주의 장송데모’를 기억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광주의 ‘민주주의 장송데모’는 15일 오후 12시 45분경에 시작되었다. 선거를 포기한 민주당참관인 70여명과 100여명의 당원이 장장을 두르고 백건을 쓰고서 민주주의와 자유를 외치는 가운데 천여 명의 군중이 이들을 따랐다. 도청으로 향하는 도중 YMCA앞에서는 다급히 출동한 무장경찰대 300여명과 시위대간의 유혈이 낭자한 충돌이 벌어졌다.

같은 날 마산에서는 오전 10시 20분 민주당의 선거포기 발표가 있었고, 오후 2시경 민주당에 의한 자유당의 부정선거 폭로 및 군중선동이 있었다. 저항은 오후 3시 30분경 600여명의 군중이 부림동, 창동 부근에서 경찰과 투석전을 펼치며 시작되었다. 경찰과 자유당의 무자비한 폭력이 자행됐고, 이로 인해 많은 사상자와 행방불명자가 속출하였다. 갖가지 풍문으로 흥분한 마산시민들의 저항은 늦은 밤까지 이어졌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 4월 11일, 그 동안 행방불명이 된 마산상고생 김주열이 눈에 최류탄이 박힌 채 무참하게 살해된 시체로 바다에서 발견되자 저항은 전국적으로 확대되기에 이른다.

4.19혁명으로 결국 이승만과 자유당 독재 12년의 장기 집권은 막을 내렸다.

이처럼 3.15의거는 4.19혁명의 실질적 도화선이었으며, 전국적 봉기의 출발점이었다. 자유와 민주주의에 대한 전 국민의 저항이었기에 수많은 희생 또한 수반되었다. 광주의 ‘민주주의 장송데모’에 참여한 시민들의 피도 이러한 희생 속에 함께 흐르고 있다.

3.15의거는 전 국민의 저항이었지만 출발은 당시 야당인 민주당의 역할이 컸다고 여겨진다. 당시 사료를 통해 국민들의 요구를 살펴보면, 그 요구가 야당과 큰 차이가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것은 자유민주주의 국가의 기본권에 대한 지향이었다. 그래서 부정선거 규탄과 선거결과에 대한 불복을 주장하는 민주당의 외침에 시민들이 동참할 수 있었던 것이다.

광주의 ‘민주주의 장송데모’ 역시 민주당이 앞장을 섰고, 시민들이 이에 동참하여 일어난 역사적 사실이다. 정치인들이 앞장섰다고 해서 폄하되거나 묻혀서는 안 된다. 3.15의거의 역사 속에 온전히 함께 기록되어야 한다.

4.19 민주유공자이며 ‘민주주의 장송데모’에서 부상당한 조계현씨는 “광주의 민주화운동 인사들마저 이 사실을 모르고 있음에 충격이었다”며 “생존가가 다 사라지기 전에 조속히 기념사업회를 구성하여 학술지의 간행과 3.15의거 기념비를 세워야 한다”고 힘주어 말했다.
곧 3.15의거 51주년이다. 광주에서 일어났던 ‘민주주의 장송데모’에 대한 의미를 다시 되새겨볼 일이다.

 

 

 

광주시서 민주주의 장송데모
경찰과 충돌 유혈소동
민주당원들과 천여군중합세

[광주서 신동준 특파원발]15일 낮 12시 45분경 이곳 민주당의 ‘민주주의 장송데모대’는 민주당 전남 선거사무장 이필호 의원의 짚차를 선두로 전남도 선거사무소를 출발하여 데모를 시작. 도청으로 향하는 도중 무장경관 200여명의 출동과 소방차의 출동으로 하오 1시 15분경 유혈이 낭자한 가운데 일대 충돌 충돌을 일으켰다.

이날 데모대는 선거를 포기한 민주당참관인 70여명과 100여명의 당원이 장장을 두르고 백건을 쓰고서 “민주주의는 절명하였다”, “우리의 자유를 찾자”고 외치며 천여명의 군중이 따르는 가운데 도청으로 향하는 도중 도청에 못미쳐 YMCA앞에서 급거 출동한 무장경찰대 300여명의 난폭 속에 일대 수라장이 벌어졌는데 이때 다시 두 대의 소방차가 출동하여 물을 퍼부어 군중은 산산이 흩어졌다.

그러나 민주당 당원과 이백여명의 군중은 경찰대의 제지에도 불구하고 도청 앞까지 전진하였다. 이때 경찰관은 이필호씨를 비롯하여 김석주, 염성웅, 오영수씨 등 4명을 연행하였다가 하오 2시 10분경 모두 석방되었다. 

 

▲동아일보 1960년 3월 16일자 기사를 한글로 재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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