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등산하 길 위에서
무등산하 길 위에서
  • 전고필
  • 승인 2010.11.03 1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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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 전남 담양, 화순군

▲ 억새풀 흐드러진 만추의 무등산.
가을이 곱게도 온다 싶더니 그 모습 보기 싫은 한파가 갑작스럽게 습격한 한 주 바람은 거셌고 삶은 고단했다. 그런 와중에 어느 방송국에서 무등산의 가을을 촬영하자는 제안이 들어왔다.

전문용어로 다른 분에게 ‘토스’를 했더니 그들과 함께 인터뷰를 하면서 함께 하잔다. 결국 피할 길 없어 무등에 들락 거렸다. 사실 방송국 덕분에 무등산에 들지 여간해서 무등산에 들어가는 시간이 허락되지 않은 일상인지라 고맙기까지 했지만 말이다.

첫 번째 촬영지는 김홍빈 대장과 함께 무돌길의 한 구간을 찾는 것이었다. 등촌마을과 배재였다. 들녘은 충분히 바삐 움직이고 있었다. 황금으로 출렁이는 대지는 어느새 공허함으로 남아 들었고 모진 바람에 억새는 인사를 주억거리며 새 생명을 내 보내고 있었다. 가을은 수확의 계절이라고 하지만 새로운 생명을 준비하는 시간이란 것이 그 길에서 느낀 단상이었다.

▲ 등촌마을 당산나무와 그 앞에 세워진 입석.
등촌마을은 여전히 농사에 의지하며 살고 있었고 물길이 사라진 자리에는 아직도 당산나무와 입석이 서 있었다. 농경의 사회가 해체되면서 도시화가 급속화되고, 특정한 종교에 대한 맹목적인 믿음이 강한 이들이 득세하면서 한없이 설 자리를 잃어만 가는 마을의 수호신들이 여전히 그 마을 보살피고 있음이 고마울 따름이었다. 배재 마을은 충장사를 끼고 있어 언제나 숙연하지만 노란 은행잎과 붉은 단풍이 곱게 물든 이 시점에는 잠시 붉어진 마음을 다독거릴 수 있는 기회이기도 했다.

광주에서 보자면 무등산을 넘어서는 곳, 담양군 남면 연천 마을을 지났다. 언젠가 지도에서  한자투성이인 이 나라 지명에 짜증이 일 무렵, 우연히 발견한  ‘바람모퉁이’라고 쓰여진 곳이 바로 연천 마을에서 정곡마을로 굽이치는 골이다.

정곡마을 안쪽으로 들어서니 경상 마을이다. 7백 살 먹은 당산나무가 자취를 감춘 마을을 지키고 서 있다. 호남정맥의 골간인 유둔재를 동쪽에 두고 6?25때 소개가 되어 마을이 아래로 내려간 탓이다. 아직도 당산을 모신 흔적이 남아있다. 입구에는 신성한 구역임을 알리는 대나무를 꽂아 금줄을 매달고 있고 당산나무에도 줄이 둘러쳐있다.

▲ 기암괴석이 어우러진 무등산 입석대.
역광이지만 노랗게 물들어가는 당산나무와 배후로 바람에 일렁이는 대숲이 고단했던 삶에도 결코 쓰러지지 않았던 남도인의 기상을 닮았다는 생각에 한 동안 그 나무 아래를 떠날 수 없었다. 북사면으로는 차밭이 조성되어 있고 차꽃이 하얗게 피어났다. 겨울이 성큼 다가옴을 느끼도록 꽃이 알려주고 있었다.

그렇게 당산나무와 고별을 하고 차를 이용한 우리는 재를 넘지 않고 바로 무동마을로 갔다. 사람의 길을 두고 차의 길을 택하는 촬영 일정이 아쉽지만 별 수 없는 터라 죽봉 김태원 장군의 혼이 서려있는 마을에 들렸다.

1908년 의병을 소탕하려는 일제의 만행이 극악에 달할 때 적병을 유인하여 돌담에서 급습하여 섬멸했다는 장군의 기개는 아직 군데군데 남아있는 돌담에서 얼핏 상상해 볼 수 있었다. “산다는 것은 곧 죽는다는 것, 기꺼이 웃음을 머금고 죽음의 땅에 들어서리라” 장군이 동생에게 보낸 시(詩)속에 전하는 굳은 다짐은 많은 생각을 했다.

▲ 무동마을 우물.
신성한 무등에서 흘러오는 물줄기가 고샅에 커다란 샘을 만들고 마을 공동체의 구심점으로 삼아 아직도 여전한 마을의 풍정이 정겨움으로 가득했다. 거기에 마당에서 도리깨질을 하는 노부부를 뵙고 살아오신 삶을 여쭈어 봤다. 대처라고는 나가보시지도 않고 팔십 가까이 무등산록에 의탁하여 사신 부부들의 얼굴에는 계곡보다 더 깊은 주름이 패여 있지만 그럼에도 화사한 얼굴은 영락없는 무등산이다.

마루를 보니 박스가 차곡하다. 묻지 않아도 알 수 있다. 시집 장가보낸 자식 손주들에게 보내는 무등의 선물이라는 것. 한참 보면서 자제분들의 안부를 물으니 광주, 경기, 서울, 부산 고루 분양을 보내셨단다. 그런 우리들에게도 마음을 보낸다. 호박 몇 덩어리와 단감을 챙겨주신 것이다.

사양해도 도리 없어 받아 들었는데 담당 피디가 돈을 챙겨 드린다. “그런 것이 아녀. 우리 얘들 생각해서 주는 것인디. 그러믄 복이 안 들어오는 법이여.” 사람이 사는 마을에 아직 정도 끊이지 않았음을 실감하는 자리였다.

▲ 동복호와 물염 적벽.
더 길을 따라가지 못하고 이번에는 샛길로 접어들었다. 상수원 보호구역인 동복호의 망미정과 적벽을 찾아가는 길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붉은 바위벽이 가을 앞에서 어떤 모습일까 깊은 호기심을 가지고 다가갔다. 저 물이 없었더라면, 저렇게 커다란 망향의 슬픔을 간직한 정자도 서지 않았을 터인데, 우뚝 서 있는 정자가 서러웠다.

그 마음 아는지 눈물처럼 물비늘도 호수에 그렁거린다. 아직 절반을 다녀온 무돌길의 자동차 여행은 거기에서 여정을 마쳤다. 다음에는 어떤 시간과 공간속에서 길과 사람을 만날 것인지 기대감을 가지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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