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 전남 담양, 화순군
전문용어로 다른 분에게 ‘토스’를 했더니 그들과 함께 인터뷰를 하면서 함께 하잔다. 결국 피할 길 없어 무등에 들락 거렸다. 사실 방송국 덕분에 무등산에 들지 여간해서 무등산에 들어가는 시간이 허락되지 않은 일상인지라 고맙기까지 했지만 말이다.
첫 번째 촬영지는 김홍빈 대장과 함께 무돌길의 한 구간을 찾는 것이었다. 등촌마을과 배재였다. 들녘은 충분히 바삐 움직이고 있었다. 황금으로 출렁이는 대지는 어느새 공허함으로 남아 들었고 모진 바람에 억새는 인사를 주억거리며 새 생명을 내 보내고 있었다. 가을은 수확의 계절이라고 하지만 새로운 생명을 준비하는 시간이란 것이 그 길에서 느낀 단상이었다.
광주에서 보자면 무등산을 넘어서는 곳, 담양군 남면 연천 마을을 지났다. 언젠가 지도에서 한자투성이인 이 나라 지명에 짜증이 일 무렵, 우연히 발견한 ‘바람모퉁이’라고 쓰여진 곳이 바로 연천 마을에서 정곡마을로 굽이치는 골이다.
정곡마을 안쪽으로 들어서니 경상 마을이다. 7백 살 먹은 당산나무가 자취를 감춘 마을을 지키고 서 있다. 호남정맥의 골간인 유둔재를 동쪽에 두고 6?25때 소개가 되어 마을이 아래로 내려간 탓이다. 아직도 당산을 모신 흔적이 남아있다. 입구에는 신성한 구역임을 알리는 대나무를 꽂아 금줄을 매달고 있고 당산나무에도 줄이 둘러쳐있다.
그렇게 당산나무와 고별을 하고 차를 이용한 우리는 재를 넘지 않고 바로 무동마을로 갔다. 사람의 길을 두고 차의 길을 택하는 촬영 일정이 아쉽지만 별 수 없는 터라 죽봉 김태원 장군의 혼이 서려있는 마을에 들렸다.
1908년 의병을 소탕하려는 일제의 만행이 극악에 달할 때 적병을 유인하여 돌담에서 급습하여 섬멸했다는 장군의 기개는 아직 군데군데 남아있는 돌담에서 얼핏 상상해 볼 수 있었다. “산다는 것은 곧 죽는다는 것, 기꺼이 웃음을 머금고 죽음의 땅에 들어서리라” 장군이 동생에게 보낸 시(詩)속에 전하는 굳은 다짐은 많은 생각을 했다.
마루를 보니 박스가 차곡하다. 묻지 않아도 알 수 있다. 시집 장가보낸 자식 손주들에게 보내는 무등의 선물이라는 것. 한참 보면서 자제분들의 안부를 물으니 광주, 경기, 서울, 부산 고루 분양을 보내셨단다. 그런 우리들에게도 마음을 보낸다. 호박 몇 덩어리와 단감을 챙겨주신 것이다.
사양해도 도리 없어 받아 들었는데 담당 피디가 돈을 챙겨 드린다. “그런 것이 아녀. 우리 얘들 생각해서 주는 것인디. 그러믄 복이 안 들어오는 법이여.” 사람이 사는 마을에 아직 정도 끊이지 않았음을 실감하는 자리였다.
그 마음 아는지 눈물처럼 물비늘도 호수에 그렁거린다. 아직 절반을 다녀온 무돌길의 자동차 여행은 거기에서 여정을 마쳤다. 다음에는 어떤 시간과 공간속에서 길과 사람을 만날 것인지 기대감을 가지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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