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에 쌀농사 지어오면 찻독부터 채웠어”
“가을에 쌀농사 지어오면 찻독부터 채웠어”
  • 나정이 시민기자
  • 승인 2010.09.15 10:48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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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절, 제사 등 특별한 날만 썼던 양영자씨네 찻독(쌀독)

▲ 뒤주 위에 놓인 찻독.
도심공동화지역이었던 광주 동구 산수동, 지산동 등은 도심철도 이설과 재개발로 많은 변화들을 겪고 있다지만, 아직도 오래된 한옥들을 쉽게 볼 수 있는 곳이다. 한옥에는 주로 노인들이 산다. 그렇다보니, 생활의 더께가 묻어있는 살림살이들이 많다. 그중에는 잊혀져가거나, 아예 이름조차 들어본 적이 없는 옛 물건들도 있다.

산수동에 사는 양영자(75)씨네 골방에는 시어머니가 60여 년 전에 장만했던 뒤주와 찻독(쌀독)이 그대로 보관되어 있다. 뒤주는 쌀벌레가 잘 슬어서 사용하지 않고 있지만, 찻독은 지금도 사용하고 있다.

큰방 안쪽에 들인 골방은 한 평 반쯤 된다. 골방에는 뒤주를 비롯하여 병풍, 제기, 교자상 등 자주 사용하지 않는 생활용품과 제 계절에 담근 과일주 등이 있다. 찻독은 뒤주 위에 놓여있다.

양영자씨는 “가을에 쌀농사를 지어오면 찻독부터 채웠어. 나머지 쌀은 뒤주에 넣었지. 뒤주에 넣어둔 쌀은 평상시에 먹고, 찻독에 넣어둔 쌀은 명절이나 제사, 생일날 등 특별한 날에만 썼어. 지금은 자식들이 다 분가해서 각자 집에서 생일을 챙기니까, 명절이나 제사 때에만 쓰고 있어.”라며 별걸 다 궁금해 한다고 했다.

생활 깊숙이 민간신앙이 파고든 양영자씨에게 찻독은 신성한 물건이다. 아직도 매년 가을 새로 쌀 방아를 찧어오면 찻독 안에 든 묵은 쌀을 다 꺼낸 후 새 쌀로 채운다. 묵은 쌀은 밥을 해서 가족들만 먹는다. 가족들만 먹는 이유는 혹시나 상가처럼 흉한 곳에 다녀온 사람이 먹게 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가족이라도 상가에 다녀온 사람은 먹을 수 없다.

또한 찻독은 비손이 이루어지는 곳이기도 하다. 찻독 앞에다가 명절마다 집을 지키고 보호한다는 성주를 위한 상을 차리고, 집안에 중요한 시험이나 근심거리가 있으면 촛불을 밝힌다. 비손을 위한 촛불은 옛날식의 커다란 밥그릇에 찻독에서 꺼낸 쌀을 가득 담고, 불을 붙인 하얀 양초를 꽂는다. 촛불은 하루 종일 켜놓는데, 불이 꺼지지 않도록 때때로 양초를 바꾸어 준다. 

지금 살고 있는 한옥이 편해서 재개발 여부를 타진 받으면 싫다고 대답한다는 양영자씨는 “뒤주나 찻독도 나 죽으면, 다 내다버릴 걸. 애들한테 내내 간직하라고 할 수도 없고……”라며 말끝을 흐렸다.

지금은 찻독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사람들이 많다. 예전에는 쌀이 귀해서 재화로서의 가치가 있어 집집마다 찻독을 중요시했지만, 지금은 쌀이 남아돌 정도로 가치가 하락하다보니 찻독이 필요 없게 된 것은 아닌가 싶다.

찻독이 사라져가고 있다는 것은 단지 쌀을 보관하는 항아리가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가족들이 동티나지 않게 조심조심 살아온 어머니의 마음이 사라지고 있는 것 같아서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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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옥 2010-09-17 16:21:10
찻독 그 한스런 이름
찻독에 담긴 가족에 대한 사랑, 가난하고 서러운 서민의 삶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곳, 찻독 바닥 긁히는 소리가 귓가에 금방 들리는 듯합니다. 점점 잊혀져가는 소중한 삶의 모습을 찾아 기록하는 기자분의 마음이 따뜻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