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피해자 ‘출구’ 보인다
일제피해자 ‘출구’ 보인다
  • 정영대 기자
  • 승인 2010.07.19 10:2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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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쯔비시 협상수용…일본정부·타 전범기업 압박
한국정부, 한일과거사 해결 인식·태도변화 필요

“전 조선여자근로정신대 문제에 대하여 ‘협의의 장’을 마련하는 것에 대하여 동의합니다.”

결국 미쯔비시 중공업이 한국과 일본의 양심 앞에 무릎을 꿇었다. 비록 한 줄짜리 문장에 불과했지만 함의하고 있는 역사적 무게만큼은 상상을 초월한다.

무엇보다 65년 동안 출구가 보이지 않던 일제피해자 문제해결에 ‘서광’이 비쳤다는 점이 고무적이다. 실제로 일본최대 전범기업인 미쯔비시가 전후 최초로 한국인 피해자들과 ‘협상’에 나섬에 따라 향후 강제동원에 나섰던 타 기업들에게도 상당한 압박요인이 될 것으로 보인다. 

▲ 시민모임은 결성된 지 채 2년도 안됐지만 활동성과 만큼은 눈부실 정도다. 지난해 일본정부와 미쯔비시 중공업의 사죄와 보상을 촉구하는 1차 서명운동에서 2만8890명의 참여를 이끌어낸데 이어 올해에는 무려 13만4162명의 서명을 이끌어 냈다. <사진제공=시민모임>
근로정신대할머니와 함께하는 시민모임 이국언 사무국장은 “미쯔비시가 우선 급한 불부터 끄자는 생각일지 모르지만 결국 한일과거사 문제 해결의 시발점이 될 것”이라며 “향후 다른 전범기업들과 일본정부에게도 여파가 미칠 수밖에 없다”고 전망했다.

일본정부와 미쯔비시는 그동안 일제당시 강제동원과 강제노역 사실을 일관되게 부인해왔다. 근로정신대 피해자와 일제징용 노무자들의 ‘재판투쟁’으로 그 실상이 드러나자 이번에는 1965년 체결된 ‘한일협정’ 뒤로 숨어들었다. 한일협정 체결로 모든 청구권이 소멸됐다는 논리를 앵무새처럼 반복한 것이다. 일본법정도 ‘한일협정’을 이유로 일본정부와 전범기업의 손을 들어줬다.

하지만 일본과 한국의 양심적 시민들은 결코 포기하지 않았다.

특히 나고야 미쯔비시조선여자근로정신대소송을 지원하는 모임(나고야 지원회)의 활동은 경이로움 그 자체였다. 1986년 조선여자근로정신대의 존재를 알게 된 그 순간부터 24년 동안 우직하고 든든한 동반자가 돼 줬다.

1988년 결성된 나고야 지원회는 20여년의 투쟁을 이끌어 온 산실이자 동력이었다. 1991년 3월1일에 시작돼 2008년 11월11일 도쿄최고재판소에서 최종기각 판결이 나올 때까지 재정적·정신적 후원자이자 최대의 조력자였다. 

재판이 끝나고 더 이상 사법적 해결의 길이 보이지 않던 절망의 시간. 이들은 ‘도쿄 금요행동’이라는 새로운 싸움을 시작했다. 매주 금요일 나고야에서 도쿄까지 360㎞의 거리를 오가며 꺼져가던 근로정신대 싸움의 불씨를 되살렸다. 2007년 7월20일 시작된 금요행동은 2010년 7월 현재 3년 동안 무려 145회째를 기록했다.

나고야 지원회의 활동은 어느덧 ‘민들레 홀씨’가 돼 일제피해자 싸움의 불모지였던 광주에 까지 날아들었다. 지난해 3월12일 만들어진 근로정신대할머니와 함께하는 시민모임(대표 김희용)은 나고야 지원회의 20년 투쟁의 산물이다.

시민모임은 결성된 지 채 2년도 안됐지만 활동성과 만큼은 눈부실 정도다. 지난해 일본정부와 미쯔비시 중공업의 사죄와 보상을 촉구하는 1차 서명운동에서 2만8890명의 참여를 이끌어낸데 이어 올해에는 무려 13만4162명의 서명을 받아냈다.

또 지난해 10월5일부터 미쯔비시 자동차 광주전시장 앞에서 시작된 1인 시위는 오는 20일이면 200회를 맞게 된다.

시민모임은  “미쯔비시의 협상수용은 국적을 뛰어넘어 인권과 정의를 회복하고자 했던 한일 양국시민들의 연대투쟁이 낳은 일대진전이자 대일 과거사 문제해결을 염원하는 범국민적 저항이 지난 65년 동안 잠자고 있던 전범기업의 양심을 깨운 쾌거”라고 평가했다.

다카하시 마코도 나고야 지원회 회장도 “나고야 지원회의 143회 금요행동과 한국의 금요행동, 광주 1인 시위, 호소 편지 등이 낸 성과”라며 “특히 한국국민 13만 여명과 국회의원 100명 서명, 대규모 교섭단 참여 등이 미쯔비시의 태도변화를 이끌어냈다”고 밝혔다.

▲ 미쯔비시 중공업이 해방 65년 만에‘조선여자근로정신대 문제에 대해 ‘협의의 장’을 마련하는 것에 동의 한다’는 입장을 밝히자 근로정신대할머니와 함께하는 시민모임과 피해자·유족들이 지난 15일 기자회견을 열어 환영의사를 밝혔다. <사진제공=시민모임>
근로정신대 싸움이 근본적인 변곡점을 맞게 된 것은 후생연금납입기록 확인과 일본정부의 99엔 지급이었다.

일본 후생노동성은 2009년 9월 미쯔비시 근로정신대 피해원고들의 후생연금 납입사실을 인정했다. 1988년 사실조회를 신청한지 11년만이었다.

이로써 근로정신대 할머니들의 ‘강제노역’ 사실이 밝혀지고 후생연금 탈퇴수당금을 받을 수 있게 돼 ‘한일협정으로 개인 청구권이 소멸됐다’는 일본정부의 논리가 설 자리를 잃게 만들었다.

특히 일본정부와 미쯔비시가 극구 부인해왔던 강제연행과 강제노역의 실체가 드러남으로써 향후 사죄와 배상을 요구할 수 있는 근거를 확보했다.

그 와중에 일본정부가 후생연금탈퇴수당금으로 99엔을 지급하는 무리수를 강행하면서 급기야 자살골을 넣기에 이르렀다. 99엔 사태는 한국국민들뿐만 아니라 일본 국내와 해외에서조차 비판여론이 급등했다.

이국언 사무국장은 “99엔 지급사건은 비단 근로정신대뿐 만 아니라 대일 과거사 문제의 모든 쟁점과 모순점이 한꺼번에 폭발한 것”이라며 “이번 협상이 65년 동안 해결되지 않고 있는 대일과거사 문제의 중요한 돌파구이자 시험대가 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수세에 몰린 일본정부와 미쯔비시는 결국 만지작거리던 ‘협상수용’이라는 카드를 내던졌다. 민간 기업을 앞세우고 일본정부는 뒤로 쏙 빠지는 전형적인 수법을 택했다. 끝내 국가책임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꼼수’다.

시민모임은 ‘일본정부’의 1차적인 책임을 명확히 했다. ‘한일협정’이라는 도피처에서 나와 ‘전후배상 입법’을 통해 한일과거사 문제해결에 적극 나서라는 것이다.

시민모임은 “근로정신대 문제만 보더라도 일본정부는 소송의 피고이자, 나고야 고등재판소 판결에 비춰 봐도 강제연행에 대한 법적 책임은 여전히 유효하다”며 “가해자가 먼저 사죄하지 않는 다면 한일관계의 신시대는 요원할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한일과거사 문제에 둔감한 한국정부의 인식과 태도도 문제 삼았다.

시민모임은 “80세 고령에 이른 피해할머니들이 빼앗긴 권리를 되찾기 위해 거족적 투쟁을 하고 있음에도 심지어 정부는 전범기업 미쯔비시에 ‘아리랑 3호’ 발사 용역권까지 쥐어줬다”며 “일제피해자들의 마음은 비참한 심정을 가눌 길이 없다”고 비판했다.

한편, 나고야 지원회 다카하시 회장과 나고야 소송 변호인단 이와사키 사무국장은 18일 광주를 방문해 피해원고와 시민모임을 만나 협상시기와 사죄·배상범위 등에 대한 협의를 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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