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땅에 살기 위하여’
‘이 땅에 살기 위하여’
  • 범현이
  • 승인 2010.05.02 21:36
  • 댓글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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꼴라쥬와 신문으로 시대를 표현하는 작가 최요안(37)

▲ 최요안 작가.
프롤로그

보내져온 메일을 확인하다 눈이 한 그림에 꽂힌다. 전투복을 입은 군인들을 꼴라쥬한 작품이다. 젊은 작가 군상에서는 찾아보기 드문 사회적 이슈를 향한 독설을 형상화한 작품이다. 반갑다. 그림만으로 이미 얼굴도 모르는 작가와 친해진 느낌이다.

통화를 하며 잠시 망설인다. 전파를 타고 들려오는 목소리에서 나른한 지루함이 느껴진다. 심심하고, 무료한, 내가 왜 이런 통화를 하고 있지? 하는 보이지 않는 거부감. 불신. 말을 하고 있는 나 역시 같은 느낌을 받는다. 그림에 꽂혀 통화하며, 그림과는 전혀 다른 직설화법이 아닌 지루함에 설핏 거부감을 갖는다. 하필이면 왜 나지? 하고 생각했을 작가에서 왜 이런 전화를 내가 하고 있지? 하는 내 생각까지 통화를 하며 순간 모든 것을 읽어버린 느낌. 얼굴도 보지 않은 서로가 무엇을 알겠다고, 그림만으로 지나온 삶의 연륜과 흔적의 무엇을 찾겠다고 하는 것인지 심한 자괴감도 들었다.

▲ 작품명 <기념촬영>, <노병은 결코 죽지 않는다(잠시 망각될 뿐이다>, <기념촬영>(왼쪽 위부터 아래 순서로)

작가를 만나러 가는 동안에도 그런 기분은 좀 채 사라지지 않았다. 작업실 근처에서 다시 통화를 하면서 그래도 왔네 하는 느낌. 하지만 작업실을 들어서서 벽에 걸린 작품 몇 점을 읽고 보면서 마음 안 한 쪽에 있던 미진한 것들이 순간 사라진다. 잘 왔다. 안 왔으면, 작가를 만나지 않았으면 후회할 뻔 했구나. 정말 오랜만에 제대로 된 보석 하나를 찾았구나. 악수를 나누는 손이 따뜻하다.

▲ 작품명 <삼성 리퍼블릭>
우리의 삶도 시간도 사회 속에 있어

스물아홉이라는 늦은 나이에 하고 싶은 것을 하고 살겠다는 일념으로 대학에 진학했다. “그 이전에는 군대를 갔었고, 직업군인인 중사로 지냈다. 대단히 자유분방하고 반항적 기질이 강한 내가 선택한 것이 직업군인이었다. 견딜 수 없을 것이라 생각한 것을 견뎌보며 살아가는 것이 이후의 내 삶에 무엇이든 지 할 수 있을 것이란 자신감을 갖게 한 기본이 돼 주었다”고 작가는 말한다.

삶의 강건한 목표 없이 누구나 다 하는 것처럼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가정을 꾸리며 평범하게 살고 싶지는 않았다고 말한다. 하기 싫은 일들 보다는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들을 모두 발산할 수 있는 것을 찾았고 그것이 바로 그가 선택한 그림. 회화였다. 이 땅에 살기 위하여, 두 발로 이 땅을 딛고 하늘을 온전하게 보며 살아갈 수 있는 삶의 목표를 찾은 셈이다.

작업은 하나같이 사회에 대한 물음표가 주조이다. 불안정한 직업의 선상에서 일할 수밖에 없는 88만원 세대의 젊은이들 시리즈와, 비정규직의 젊은이들로 인해 서서히 잊혀져가는 질곡의 지난 역사와 현대의 사화적인 쟁점들, 찬란한 햇빛아래 고층으로만 오르는 빌딩 아래 노란 불빛을 한 작은 가난한 집들이 따개비처럼 붙어 있는 극대화된 반어와 리얼리즘이 초현실주의로 표현된다.

“80년대의 민중미술의 발전은 시대가 그것을 요구했고, 그림을 그리는 사람들이 역사적 소명 앞에서 양심을 가지고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현재도 역시 보이지 않는 곳, 그림자로 자리를 지키고, 어둡게 가려져 있는 것들을 찾아내 작업 안에 끌어들이고 환기 시키는 일은 역시 작가의 몫이다. 그림을 그리는 예술가만이 할 수 있는 일이고, 난 그 일을 하고 있을 뿐이다.”

▲ 작품명 <세월은 흘러가도 산천은 안다>

▲ 작품명 <천민자본주의가 국민 여러분께 드리는 선물>
작업 안에서 표현되는 현재의 리얼리즘

그냥 보고 무심히 지나치는 것은 없다. 느낌표이기 이전에 물음표를 완곡하고 적확하게 던진다. 물론 이 사회의 가려진 단면이고 피하고 싶어 하는 것이 주류이다. <賤民資本主義가 국민 여러분께 드리는 선물>도 그렇다. 정치가의 얼굴이 단순한 재료로 단순하게 표현된다. 선거를 할 때 사용하는 기표용구이다. 사람들의 기표용구가 모아지고 모아져서 한 사람의 정치인이 탄생하고 수 천, 수만의 사람의 힘이 모아진 기표용구의 정치인은 거대 권력으로 다시 태어난다. 작가는 거대 정치권력자의 미묘한 웃음 뒤, 하나하나 사람들의 기표에 따른 신뢰와 열망, 그리고 다시 보여 지는 부조리와 엄청난 부작용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第 2 敎育隊>와 <기념촬영>에서는 군부로 위장한 엄청난 폭력성과 보수성을 말한다. 전투복에는 낱낱이, 이들이 겪어 온 지나온 과거들이 인각되어 있다. 머릿속의 기억은 시간이 되면 사라지고 지워지지만 전투복 안, 피로 각인된 흔적은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작가가 의도한 바는 바로 그것이다, 5.18민중항쟁에 관한 사진만이 아닌 분단 조국에 관한 다양한 사진들이 군복 위, 꼴라쥬로 입혀졌다. 얼굴은 시체처럼 표정이 없다. 냉소만이 자리하고 있을 뿐이다. 흔적을 잊지 말라는, 살아있는 동안 영원히 기억하라는 경고의 메시지이다.

<第五列>에서는 이미 사진으로 우리에게 눈물 나게 친숙한 5.18광주민중항쟁의 처절한 순간이 그대로 표현 되었다. 배경에는 그날을 기록하는 신문이 바탕으로 깔렸다. 신문에는 의도적인 작가의 편집이 들어 있다. 콜라쥬로 표현된 사진의 전투복을 입은 군인과 배경인 그날의 신문. 하고 싶은 말을 다하지 못했던 흔적과 상흔이 그대로 표현되었다.

▲ 작품명 <第五列>

<第五列>은 제목부터 이미 의미심장하다. 아니, 더 이상의 설명이 필요 없다. 제5부대는  평시에도 상대국의 내부에 잠입해서 모략공작을 하는 자를 일컬으며, 간첩에 대해서도 넓은 의미로 제5열이라고 한다. 다시 말하면 <第五列>의 군인은 이미 자국민의 안전을 지키는 이 나라의 군인이 아님을 의미한다.

당신들의 공화국이 아닌 우리들의 공화국을 위해

“밑바닥까지 처절하게 가보았다. 내가 관심을 갖는 것은 단지 그림을 그리는 일이 아니다. 예술 그 자체보다는 인간 정신사의 거대한 흐름의 맥락에서 얽혀지는 관계 속에서 찾아내는 물리적 현상들의 메카니즘이다. 결국 예술은 인간들의 사회활동 안에서 생겨난 산물이기에 인간과의 관계 속에서 자연스러운 순리를 먼저 이해하고 인간이 살아가는 과정, 완성해나가는 생각, 다시 말해서 나 자신 스스로 인간답게 살고 서로의 존재를 발견하며 살아가고 싶다. 이것이 내가 손에 붓을 잡은 이유이다.”

그래도 아직 희망은 있다. <그들>의 시리즈가 희망을 말한다. 신문을 배경으로 한 갖가지의 역사와 개인적인 사실들에 입각한 젊은이들은 힘들어하는 표정 속에서도 많은 사연만큼 무엇인가를 향해 노력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책을 옆구리에 끼고 있거나, 붓을 들고 상념에 젖고, 무엇인가에 열중하고 있는 모습은 현재보다는 미래 지향을 보여준다고 여기고 싶다.

▲ <Modern Portrait> 시리즈.

기운은 없어 보이지만 그래도 아직은 젊다. 전쟁 속에서도 사랑은 피어나고 빛에 허덕이면서도 아이들은 자라고, 5.18광주의 그 잔인한 봄 속에서도 시장상인들은 공동체를 형성하고 김밥을 싸지 않았던가.

작가의 그림은 오히려 단순하고 명료하게 읽혀진다. 국가 권력의 부조리나 사회구조 속에서 빚어지는 모순, 각자의 속에 내재된 상대를 모멸하며 얻어지는 배타적인 욕망 등은 후대에 책임을 전가한다. 서로 타협할 수 없는 갈등구조가 형성된다는 것은 이미 한 쪽이 인간이기를 거부했을 때 가능하다. 기득권을 가진 강자의 논리가 아닌 이제는 당신들의 공화국이 아닌 우리들의 공화국을 위해 한 발 한 발 나아가야 할 대이다. 미술 운동은 언제 어디서나 필요하지만 지금이, 바로 지금이 가장 필요할 때이다. 작가는 이미 우리들의 공화국을 위해 자신의 역할을 해내며 이 시대를 기록하고 있다.

문의 : 010-7700-6468

▲ 작품명 <원형초상>

에필로그

옆얼굴은 전생이 스쳐지나가는 길 / 옆에 앉아 네 고통을 읽었다 / 눈 밑에 상처가 나 있었다 / 벼랑 끝에서 돌아왔다고 / 돌아오느라 자신과 좀 싸웠다고 했다 / 전생과 자욱을 생각하는 동안 / 오후 세 시의 햇빛은 예각을 눕혀 / 사물의 그림자를 길게 늘이고 있다 / 옛 격전지에서 유물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 성 밖 진흙 해자에 엎드린 유골엔 / 뇌수가 차 있었다는데 뒤통수에 / 정교한 칼자국이 남아있었다는데 / 치열한 싸움의 흔적, 상처의 뇌수는 관계가 / 정교할수록 깊이 파고들수록 오래 남는다 / 수백 년이 지나도 사라지지 않는다 / 머리 위 여름 솔의 열매가 싱그럽다 / 푸른 살을 이로 깨물면 아프다고 하겠지 / 살아있을까 소나무 그늘 사이로 멀어지는 / 너의 뒷목이 가늘고 말갛다 가랑비雨 발목 같다 / 혹 너의 전생은 비였을까 / 전생을 생각하다 너를 놓쳤다 / 그렇게 오래 자욱이 남을 줄 모르고 詩.옆모습 作.권현형

며칠 매운바람에 장마같은 비 뿌리더니 화사한 꽃 보인다. 분홍과 빨강. 그냥 지나간다. 아무것도 못 본 척, 못들은 척 지나갈 뿐이다. 늦은 밤. 길목을 지나다 낮게 걸린 붉은 연등 무더기를 본다. 영혼 하나에 붉은 등 하나씩 몫이다. 바람이 분다. 전생의 업보로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붉은 등 하나 떨어진다. 당신을 잃는다. 나를 잃는다.

문득문득 내가 사라진다. 저 편의 나와 자주 교환된다. 스미고 녹아들어 구분되지 않는다. 나는 하나의 나로만 지어진 것 같지 않다. 혼자라면 이리도 어깨가 아프고 무릎 꺾이고 무거울 리 없다. 또, 하나의 내가 분명 있다. 늘 등 위에 업고 다니는 내가 있다.  모든 것을 데려가는 것은 시간. 데려오는 것도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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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성태 2010-05-06 12:14:03
좋아 좋아.. 멋져브러..

이은성 2010-05-03 13:10:09
즐겨보는 작가탐방! 지난 금요일에 안올라와서 기자님이 아픈가하는 걱정을 했는데..역시 이번주도 실망시키지 않네요. 요즘 보기드문 작업을 찾아내주어서 놀랍고 신기해하고 있어요. 우리 속에 늘 있는 광주민중항쟁. 5월을여는 그림을 보여주어서 정말 고맙습니다..기운이 나요. 다시 열심히 살아야겠어요..작가님. 좋은 작업감사합니다. 늘 지켜볼께요..

감탄 연발 중! 2010-05-03 10:46:27
찾아낸 기자님도 고맙지만 이런 그림을 그리는 작가님에게도 감탄해요..너무 속이 다 시원하고 멋져요. 살면서 놓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들을 작가님은 실천하고 계시는군요. 이런 그림을 찾아내는 기자님도 정말 대단해요. 당신같은 분들이 있어 세상은 아직 살만한가 봐요. 월요일 아침. 기운을 내서 이번 란 주는 잘 보낼수 있을것 같아요. 작가님도 기자님도 모두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