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릉빈가(迦陵頻伽)’ 날아오르다
‘가릉빈가(迦陵頻伽)’ 날아오르다
  • 범현이
  • 승인 2010.04.23 16:4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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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자와 분청으로 불화를 그리는 작가 ‘조성옥(44)’

▲ 조성옥 작가.
프롤로그

얼굴과 몸에서 빛이 나는 사람을 만났다. 저를 아시나요? 우리 가족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신 건가요? 전화 너머 목소리가 맑다. 통통 튄다. 순간 당혹스러웠다. 알고 있는 것은 작품 몇 점. 시립미술관의 <남도도자 - 마음과 정신을 담다> 도예전시에서 본 관음상 작품이 전부였다. 통화를 하다말고 혼란에 빠진다. 아니다 대답하며 관음상을 떠올린다.

시립미술관에서 만난 작가의 작품을 온전하게 기억한다. 굳이 후광을 표현하지 않아도 도기 안에서 관음상은 형형한 빛이 났다. 한동안 앞을 서성이게 만들더니 전시장 안을 다 돌아본 후 다시 그 자리로 돌아오게 하는 힘을 지녔다. 넋이 나가도록 들여다보았다. 궁금증은 작가로 더해져 결국 전화버튼을 누르게 만들었다.

작가를 찾아가는 길. 비가 내린다. 자주 지나치는 길인데 낯설다. 정말 생각지도 못한 곳에 작가들은 요소요소 숨은그림찾기처럼 빼곡하게 둥지를 틀고 있다. 아파트 상가 2층. 관음보살이, 비로자나불이 손을 모으고 멀리, 가까이 영혼의 세계를 보고 있다.

고통은 사람을 한없이 깊어가게 해 - 결국 사랑이다

▲ 작품명 <염원1>
많은 이야기를 순식간에 나눈다. 아픔이 그대로 느껴진다. 삶의 고비 고비는 예견 없이 다가온다. 삶의 시간 속, 골목을 돌아서면서 맞닥트리는 우연은 사실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감지하지 못했을 뿐, 아마도 무수한 사인을 보냈을 것이다. 내 삶의 더듬이가 선명하지 않아 감지하지 못했을 뿐이다. 아니면 알면서도 짐짓 피해가고 싶은 불순함에 모르는 척 눈을 감았을 경우이다. 모든 우연은 이미 정해진 수순이고 우리는 선택의 여지없이 다가오는 필연들을 받아내야 한다. 작가는 우연을 가장한 필연들을 가감 없이 받아들였다. 그리고 오히려 당연하다는 듯 그것들을 감싸 안았다.

우연을 가장한 고통은 사람을 밑바닥까지 끌어내리고 다시 더 깊이 끌어올려 ‘하심(下’心)과 ‘방하착(放下著)’을 알게 한다. 바닥까지 내려가 본 사람은 안다. 세상을 향해 감사할 것이 얼마나 많은지. 새벽, 눈을 뜨게 하는 것도 감사하고, 호흡을 하고 하늘을 바라볼 수 있는 것도 감사하다. 심지어는 시간이 지남과 동시에 고통을 준 것까지도 감사해지며 그 고통으로 인해 다른 사람들이 모르는 다른 세상의 심연의 깊이를 알게 해준 것마저도 감사하게 된다.

작가가 바로 그렇다. 그가 만드는 도기는 단순한 도기가 아니다. 영혼의 울림. 깨달음의 깊이. 고통의 감사함의 모든 것이다. 적어도 그렇게 느껴지고 보인다. 작품을 바라보다 깊은 한숨이 훅! 하고 나온다. 이제 다다랐구나. 영혼의 바다에. 무심함의 깨달음의 바다에. 눈물과 통곡에서 벗어나 영혼의 깊이에.

동양화에서 도자기, 다시 불화로

작은 우주 하나 가슴 안에 키운다. 아니 세상에서는 평가할 수 없는 광활한 우주다. 그 우주는 도기 안의 부처로 다시 태어난다. “어린 시절 늘 도예는 가까이 있었다. 가족 모두가 예술을 하고 있어 자연스러운 환경이 나를 이끌었고, 동양화 전공에서 도자기로 다시 불화로 간 길 또한 스스로 어떤 강한 힘에 이끌려 간다. 어쩌면 살아가는 동안 만나야 하는 당연한 수순인지 모른다.”고 작가는 고백한다.

청자토로 넓은 판을 수작업으로 만들어 적당히 건조된 흙 위에 작가는 불화를 그린다. 아니 불화란 단어가 마땅치 않다. 우리가 흔히 접하는 민화처럼 쉽고 편안하게 다가서는 관음보살과 비로자나불을 그린다. 종교와는 무관한 작업들이 작가의 독특함을 드러내게 하기에 충분하다. 마애석불 같은 느낌이 온 몸으로 그대로 전해진다.

동양화를 전공한 미려한 우리의 선조들의 선이 그대로 살아난다. “의외로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에 많은 힘을 받는다. 같이 어울리고 같이 부대끼며 살아가며 느끼는 절망과 희망이 작업 안에서 녹아들고 다시 표현되는 것 같다”고 말한다.

작가는 도예심리학 박사 우리나라1호다. “우리 막내는 내게 있어 현손한 부처이다. 작은 꼬마부처를 만나면서 내 모든 삶의 방향은 당연하게 불화를 그리게 된다. 억지도 아니었고 일부러 의도한 바도 아니었는데 손은 자연히 불화와 흙에 가 닿았고 현재의 작업은 그것의 연장선이다.”

적당히 건조된 흙 판에 그림을 그리는 데는 2~3일 소요된다. 선으로 음영을 표현한 후 다시 분청토를 바르고 건조시켜 구워내면 현재의 작품으로 완성된다. 두꺼운 판의 특성상 가마 안에서 균열이 갈 법도 한데 그럴 일은 없다. 워낙 철저한 준비와 계산된 작업으로 최대한의 효율을 높이기 때문이다.

날개를 달고 날아오르다

작가는 지적 장애아의 심리치료에 왕성하게 열중한다. 공방에서 진행하는 도예치료에는 지적장애들의 천국이다. “처음에는 걱정스러웠던 아이들도 시간이 지나면 익숙해지고 제법 마음이 들어간 작품을 만들어 내며 스스로 흡족해 한다.”며 “장애아는 천사다. 몰랐던 세상을 알게 해주는 혜안도 가지게 한다. 사랑을 받기 위해 태어난 아이들은 내게 있어 작은 스승이며 삶을 깨달아가게 하는 부처이다.”고 고백한다.

작업에 사용하는 문양도 아이들과의 수업에 사용하는 문양도 우리의 것들에서 선별한다. 처음엔 외국의 문양들에게 마음을 뺏겼지만 점차 시간이 지나자 우리의 문양들이 제 발로 다시 찾아들었고, 이제는 그 모든 것들이 녹아들어 전통의 현재의 문양을 만들어가며 스스로 사용하는 묘미도 깨달았다.

올가을에는 장애인친구들과 함께한 전시와 열심히 작업 한만큼 개인전도 계획 중이다.

문의 : 010-2655-9955

에필로그

거울의 뒷면은 깜깜한 어둠이다 / 쟁그랑하고 깨어지는 것은 어둠 때문이다 / 선명한 것의 배후에는 어둠이 도사리고 있다 // 어릴 때, 별을 보면 / 선명하게 빛나는 별 옆에 희미한 별빛이 있었다 / 똑바로 쳐다보면 사라지는, 그러나 다시 사라지는 눈 밖의 빛 // 내 사랑은 대체로 희미하였다 / 똑바로 쳐다보지 않았다 / 가물가물한 기억 속에 누군가가 있었을 뿐 / 너를 눈 앞에 두고도 나는 / 눈 밖에서 부지런히 기억을 만들었다 // 선명한 것들은 나의 적이었다 / 선명한 것들은 끊임없이 나를 지웠고 / 나는 줄기차게 선명한 것들을 지웠다 / 희미한 사람들과 희미한 불 빛 아래에서 / 희미하게 웃고 울었다. 버스와 전철과 택시를 타고 희미하게 집으로 돌아왔다 / 희미해지지 않으면 견딜 수 없는 날들이 흘러갔다 // 나 이제 희미해졌다 / 내가 그러했듯 지금쯤 너의 사랑도 희미할 것이므로 너의 눈 밖에서 나는 희미하게 빛날 것이다 / 똑바로 쳐다보면 사라지는 / 그러나 분명히 있는, 저 눈 밖의 빛 -  作정병근. 詩 희미한 것에 대하여

지금을 산다. 지금을 살지만 어제를 기억하고 내일을 예견한다. 지금 안에 어제와 내일이 있다. 돌아갈 수 없을 만큼의 직선으로 곧게 뻗어 온 지금. 갑자기 만나는 혼란스러운 길들에 지금의 어제와 내일을 느낀다.

내 몸은 단 한 번도 느낌표처럼 꼿꼿하게 서지 못했다. 항상 물음표로 서서 세상을 굽어본다. 아아. 부질없는 것. 다 집어치우고 죽순처럼 단순하게 쑥쑥 자라기라도 했으면. 문을 굳게 닫고 묻혀있던 것들이 청진한 얼굴로 다가서면 깊은 터널 같은 혼곤함도 사라지게 되는 것일까. 내 안의 상처도 푸르고 곱게 부식되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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