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명한 유권자의 사전에는 ‘묻지 마 투표’가 없다
현명한 유권자의 사전에는 ‘묻지 마 투표’가 없다
  • 김순흥
  • 승인 2010.04.19 10: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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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순흥 한국사회조사연구소 소장

다시 선거철이 되었다. 21세기가 시작된 지 벌써 10년이다. 일제가 물러가고 65년이 지나는 동안 우리 정치사는 여러 가지로 왜곡되어 온 가운데, 군사독재이후 이 땅에 독버섯처럼 자리 잡았던 지역갈등이 아직도 건재하면서 지역할거주의가 수그러드는 기색이 없다. 정책의 대결도 아니고, 이념의 대결도 아니고, 단지 살고 있는 지역에 따라 무비판적이고 맹목적인 지지에 의해 당락이 결정되는 병폐가 하루라도 빨리 없어져야 할 것인데 아직도 싹이 파랗지 않다.

선거는 유권자를 위해 있는 것이다

정치는 서비스산업이다. 정치는 정치인에게 권력을 쥐어주기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소비자인 유권자를 위해 서비스를 베풀도록 정치인에게 권한을 위임하는 것이다. 정치의 궁극적인 목적은 유권자인 국민이 안심하고 편안하고 즐겁게 살 수 있도록 해주는 서비스인 까닭에, 소비자인 유권자는 시장경제의 원리에 따라 가장 좋은 서비스를 믿음직하게 제공하는 정당이나 후보에게 표를 주는 것이다. 그러나, 지역갈등의 폐해는 이 같은 소비자의 고유권한인 선택권을 없애버렸다. 오랫동안의 지역대립구조에서 소비자는 품질이나 값을 보고 상품을 선택하는 능력을 잃어버린 채 간판만 보고 투표하는 기계처럼 되었다. 이 지역 저 지역 모두 똑같다. 네가 하니까 우리도 어쩔 수 없이 그런다는 핑계를 대면서. 

독재에서 벗어나고 민주주의를 되찾기 위해 정권을 바꾸는 대통령 선거에서는 그와 같은 투표행위가 필요하기도 했고 실제로 정치사를 바꾸는 역할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동네정치인 지방자치선거는 다르다. 누가 되어도 어차피 같은 동네 사람인데 특정 정당에 대한 ‘묻지 마 투표’는 결국 소비자인 유권자의 피해로 돌아오게 되어 있다. 서로 경쟁을 시켜야 소비자가 득을 보는데, 경쟁이 없는 독점 장사는 소비자의 눈치를 살피지 않는다. 소비자를 위해 좋은 상품을 내놓지도 않고, 싸게 내놓지도 않는다.

‘묻지 마 투표’:당선자도 낙선자도 유권자를 버린다

현명한 유권자는 후보자들과 정당들이 경쟁을 하도록 만들어 많은 것을 얻어 낸다. 잘하거나 못하거나, 열심히 하거나 대충하거나, 특정 정당의 간판만 달고나오면 무조건 ‘몰표’를 주는데 누가 유권자에게 신경 쓰겠는가? 거꾸로, 아무리 능력이 뛰어나고 유권자를 위해 열심히 해도, 특정 정당의 간판이 아니라는 이유로 표를 주지 않으면 열심히 하고 싶은 사람이 있겠는가?

당선이 되더라도 아슬아슬하게 된 사람은, “아이구 뜨거워라, 하마터면 큰 일 날 뻔 했네. 열심히 안하면 다음 선거는 어림도 없겠네” 하면서 선거 때뿐만 아니라 평소에도 유권자를 위해 혼신을 바칠 것이고, 비록 떨어지기는 했지만 아슬아슬하게 떨어진 사람은 “조금만 더 했으면 되는데, 아이 참 2%가 부족해서…” 하면서 젖 먹던 힘까지 내서 더욱 열심히 할 것이다.

이상적으로는, 51대 49로 표를 주는 것이 가장 좋겠지만, 55대 45도 나쁘지 않고, 하다못해 60대 40이라도 희망을 가질 수 있다. 70대 30이나 80대 20의 지지는 유권자 스스로 제 무덤을 파는 일이다.

정치인에게 표를 던지는 것은 우리가 잘 살기 위한 것이고, 특정 정당이나 특정 인물을 지지하는 것도 궁극적으로는 우리가 보다 나은 삶을 살아가기 위한 것이다. 정당이나 후보들을 길들여서 ‘좋은 후보를 내는 정당’, ‘유권자를 생각하는 후보’를 만들려면 ‘몰표’나 ‘무조건 지지’ 같은 어리석은 짓은 지양해야 한다. 표를 분산시키기 위해 필요하다면, 내가 싫어하거나, 내가 지지 하지 않는 사람에게조차 표를 주는 것이 현명한 유권자일 것이다.

더 이상 뉴스에서 ‘일당독식’, ‘무조건 지지’, ‘묻지 마 투표’, ‘몰표’ 따위의 말을 찾아볼 수 없게 되기를 간절히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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