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표인식’
‘좌표인식’
  • 범현이
  • 승인 2010.04.02 18:45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성경으로 삶의 길을 묻는 작가 정일(45)

프롤로그

전시 중에 이미 한 번 만난 적이 있어서인지 낯설지 않았다. 아니, 어쩌면 삶에 대한 고민들이 작품 안에서 보여주듯 내밀한, 늘 스스로에게 묻는 질문들이어서 친근감이 들었는지도 모른다.

처음 전시를 보러 간 날을 확연히 기억한다. 유난히 바람이 많이 부는 날이었고, 성경구절을 모태로 한 작업이 생경해 그림을 보다가 전시장 바깥으로 나가 바람을 느꼈다. 다시 들어와 천천히 그림들을 보면서 점점 우울해졌다. 불현 듯 한 모서리가 어긋나는 불편함. 퍼렇게 찍혀 넘어가는 절망의 바다. 내면에서 자꾸 꺼내도 잡히지 않은 인식의 무게. 눈물마다 빛나는 것. 헐벗은 가지 끝마다 돛을 휘날리는 자유. 잠시도 털어낼 수 없었다. 차마 그림을 외면할 수 없었다.

그림이 무수히 많은 질문을 던졌다. 가졌던 모든 것들과, 가지려고 했던 모든 것 사이에 만났던 모든 사람들과, 헤어질 수밖에 없었던 모든 사람들 사이에 언제나 말없이 놓여있는 선택의 길. 그림이 다시 묻는다. 소름을 돋게 하는 공허한 시선으로 묻는다. 자신만의 내부의 골방을 가졌는가. 서로 헤아리고 누구를 위해 몸 낮춰 본 적 있는가. 다시 작은 소리로 속삭인다. 우리들 손에는 그물이 들려져 있어. 그물엔 나름의 법칙이 있지. 통과해야 할 것들은 가두질 않지.

화려한 색채, 무거운 질문들

일러스트이다. 얼핏 보면 작고 앙증맞은 동화가 연상될 정도로 밝고 경쾌한 색감이 주조이다. 깊이 바라보면 안 된다. 서서히 그림 안으로 흡입되어 눈길을 떼려할 때는 이미 나는 사라지고 없다. 물음표보다는 당당하게 서라는 느낌표를 강하게 요구한다. 한 번이라도 제 발로 서서 세상을 바라보며 맞서 보았다면 견고하게 요구하는 느낌표를 요구할 수 있다. 하지만 늘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자신도 모르게 기대고 암묵으로 의지했다면 물음표로 살아왔다면 이미 사라져버린 자신을 느낄 수도 없다.

그림들이 화려한 색감과 스스로의 질문을 반어로 묻는다. 얼마나 성실하게 살아왔느냐. 자신이 선택한 길의 방향에 책임을 지느냐. 자신의 개인적인 욕심을 털고 신 앞에 당당히 나설 수 있느냐. 모든 것을 버린 자만이 새로운 빛나는 빛을 얻을 수 있다.

성경 안에서 자신의 작품을 구사한다. 언어를 택한 복음서 이전의 것, 사람의 감성에 호소하고 보여주는 작은 이미지로 복음을 전파한다. 작가는 “스스로 비겁하지 않기 위해 선택한 작업이다. 자신을 속이지 않고 살아가는 것이 삶의 목적이다. 그림은 내게 있어 스스로 극복하며 자신을 찾아가는 과정이기도 하다. 그 과정 중 예술적 유희로 표현방법을 찾았고 성경을 그림으로 표현해가는 작업을 하고 있다”고 설명한다.

20여 년 간의 작업 결과이다. 늘 머릿속에, 마음에, 가슴 속에 성경을 두고 살았다. “대학 졸업 무렵 어떤 계기로 인해 성경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지금까지 내 안에 한 몸으로 살아간다. 예배, 기도, 찬송을 하며 사람의 본질을 찾아가는 모든 것들이 그림으로 표현된다. 사람들 역시 자신의 본질을 찾아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난 그림으로 본질을 찾는 사람들에게 좌표인식에 있어 작은 도움을 줄 뿐이다.”

삶의 방향은 선택이지만 영원히 머무를 수는 없다

<좌표인식Ⅲ>에서는 굽이진 길 가운데 물음표를 던진 한 사람이 다리를 길게 뻗은 채 앉아있다. 지쳤다. 어디로 가야하는 길인지 알 수 없다. 가야할 길도, 어디서부터 걸어온 길인지 마저도 알 수 없다. 분명하지 않은 좌표를 스스로도 인지하지 못한 채 넋을 놓고 주저앉았다. 앞만 보고 달리던 어느 날, 자신을 뒤돌아보며 지금까지 걸어오던 길이 과연 옳은 시간이었는지 스스로에 던지는 현대인들의 질문 같은 그림이다.


<시편 40:16>에서는 즐겁고 행복한 믿음으로 바닥이 보이지 않는 낭떠러지 위를 가느다란 십자가 위로 건넌다. 물론, 망설이는 사람도 있다. 권유하고 건너자 하지만 여전히 망설인다. 이미 건넌 사람은 두 팔을 벌리고 자유를 만끽한다.


<마태복음 11:28>은 굳이 설명이 필요 없다. 그림이 보여 지는 그대로 소소하게 읽혀진다. 두꺼운 벽 밖으로 환한 빛이 보이지만 커다란 쇠공에 자신의 발을 묶고 있는 사람은 절망으로 앉았다. 자신이 가진 모든 것들을 버려야만 빛을 찾아갈 수 있다는 것을 알지만 가지고 있는 모든 소유물을 쉽게 버릴 수가 없다. 딜레마는 거기서 시작된다. 이미 알고 있는 명쾌함은 있지만 스스로 결정하고 행동할 수 없는 사람들. 바로 우리들이다.


<좌표인식Ⅴ>와<Ⅵ>에서 작가는 말한다. 모든 것은 스스로의 선택사양이다. 암흑 속에서 그림자를 끌며 스스로 걸어 나오던지, 더 깊은 암흑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것 까지 모든 결정은 자신만이 할 수 있다. 더불어 절정에서 수많은 계단을 걸어 내려온 사람에게 거침없이 묻는다. 막다른 골목, 칠흑 같은 절벽 위 뛰어내릴 수도 없는 사람이다. 어떻게 할 것인가. 뒤를 돌아서 다시 올라설 것인가. 아니면 절벽 아래를 향해 뛰어 내릴 것인가. 자신만의 대답을 얻을 수 있다. 자신만이 스스로 결정할 수 있다. 앞은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칠흑의 어둠이다.

▲ 작품명 <좌표인식Ⅴ(좌)>와 <좌표인식 Ⅵ>
기본은 사람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현실에 살고 있다. 작가는 현실의 문제에 있어서도 손을 놓지 않는다. 2008년 11월의 6번째 전시회가 바로 그것이다. <‘공존’-도시화에 대한 두 번째 생각>에서 전 세계의 교통사고, 나이로비아 유아 사망률, 케이프타운의 가난한 흑인들의 기아, 라틴아메리카 카리브 해 지역의 위생과 식수에 대한 가혹한 정책, 묘지를 조립식 간이주택으로 사용하는 카이로의 사자(死者)들의 도시까지 가혹한 현실을 작업으로 반추한다.

작가는 “내가 현실이다. 내가 현실의 구성원이고, 공급자이자 양산자이다. 내 배가 부르다는 것은 보이지 않는 곳, 세상 어느 한 사람이 배가 고프다는 뜻이며, 내가 부자가 된다는 것은 그만큼 가난한 사람들이 양산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불합리한 세상은 내가 만든 것이다.”

더불어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말을 사랑한다. 모든 것들이 거꾸로 가고, 이 세상에서 반역으로 사라지고 몰살된다 하더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사람이기 때문에 다시 일어서서 나아간다. 절망을 희망으로, 슬픔과 고통을 희망으로 일구어 변혁해가는 힘이 있기 때문이다. 아무리 가늘더라도 절망 속에서도 실 낱 같은 빛을 발견해 그 빛을 따라가며 더 큰 빛을 광속으로 발전시켜가는 원동력을 갖는 발전소가 바로 사람이기 때문이다.

“무슨 일이 닥치고 힘들어지면 가만히 소리 내어 말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겨나갈 수 있다. 다시 일어설 힘을 다시 찾고 찬양을 하고 기도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가 갖고 있는 놀라운 힘이다.”

문의 : 010-2286-9135

에필로그

눈 감고 네 발 전체를 섬이라고 상상해봐. 이를테면 열도 같은 거. 사람들 사이에 섬이 있다는 말은 거짓이 되지. 섬은 바로 네가 품고 있는 거니까. 양말을 벗고 욕조 안으로 들어가 봐. 물을 콸콸 틀어놓고 슬그머니 발을 밀어넣는거야. 섬에 비가 내리니? 폭포가 쏟아지니? 차가워서 흠칫 놀란 모양이구나. 네 발이 파닥파닥 튀고 있잖니. 걱정 마. 네 섬에는 물고기들이 살고 있는 거니까. 푸른 등을 가진 물고기들. 지금부터 일제히 솟구친다. 알겠지? / 그 섬에 가고 싶니? 굳이 누굴 찾아갈 필요는 없어. 섬은 바로 네가 품고 있는 거니까. 이제 네 손을 다리라고 생각해봐. 가만히 다가가 발을 꼬옥 쥐는 거야. 마른 손이 젖은 섬에 가는 길. 마른 네가 젖은 네게 가는 길. 열리고 있니? 내가 뭐랬니. 푸른 이끼들이 힘줄을 타고 네 심장을 향해 달려오고 있잖아. 너는 이렇게 푸르러. 푸르러. 푸르다구! 준비됐다면 눈을 떠도 좋아. 자. 이제 건너갈 수 있지? - 詩섬. 作오은

빈 집, 빈 사무실. 종일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화분 속, 시들어가는 튤립 알뿌리의 수액을 빨아들이는 소리, 시간이 흐르는 분진만이 보이고 들린다.

때론 보이지 않아도 열려오는 귀와 눈이 있다. 나이가 들면서 점점 낯선 사람, 도무지 알 수 없던 내 얼굴. 저 낯익은 푸른 독. 적막을 오래 쓰다듬은 손바닥에 푸른 물이 든다.

내 몸의 플러그가 뽑힌다. 세상과 불통이 되는 그 시간. 나는 누구에게도 나를 타전할 수 없다. 꼬박 밤새운 날. 새벽은 혼란 속 어둠의 끝, 내 안에서 밖으로 걸어 나오는 일이다. 바람에 몸을 일으켜 머리를 감는다.

들어가도 늘 바깥인 집. 있어도 늘 아무도 없는 사무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