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어, 세상 밖으로
걸어, 세상 밖으로
  • 범현이
  • 승인 2010.03.19 17:05
  •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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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 새로운 실험 작업 중인 도예가 서명수(40)

▲ 서명수 작가.
프롤로그

다시 봄이다. 흐렸다 개었다, 추웠다 따뜻해졌다 하는 봄날의 날씨는 변덕스러운 할미를 닮았다. 운전석 창으로 손을 내밀어 바람을 느끼며, 만지며 작가를 만나러 가는 날은 부드러운 봄날이었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바람이 머리카락을 온통 헤집어 대더니 담양으로 가는 길에는 창을 다 열어두어도 시원함을 주는 바람만이 존재했다.

노란 산수유가 길 가로 만개해 가는 것이 보이고 밭두렁 이곳저곳에서 산나물을 캐는 것도 보인다. 매화는 절반쯤 영글어 막 벌어질 때를 기다리고 다리 밑 물빛은 깊어져 송사리 떼와 함께 유영 중이다. 물가의 버드나무는 물이 오를 대로 올라 며칠만 지나면 바로 연두 빛 아기 손 같은 새싹을 피워낼 것이다.

산책을 하고 왔다는 작가를 만난다. 부드러운 웃음, 성실해 보이는 말투, 공부하는 중이라고 겸손해하는 표정까지 봄날을 닮았다. 목소리 높여 말하지 않아도 표정으로 순간, 그가 하고 싶어 하는 말을 다 읽어버린다. 아직은 갈 길이 멀어. 이제 시작이야. 하고 싶은, 해보고 싶은 작업들을 살아있는 동안 모두 해 볼 거야.

봄과 같이하는 새로운 시작 - 한발자국 떼다

힘든 시간을 보냈다. 하고 싶은 일들을 접어두고 가족을 위해 많은 시간을 투자했다. 지금도 그렇지만 가족은 늘 그에게 있어 그리움 같은 애잔한 존재이다. 가족의 평안과 안정을 위해 철들 무렵부터 새벽에서 밤늦도록 꿈을 접어두었다.


“원래는 목공을 하고 싶었다. 가족이 안정되고 서로의 갈 길에 들어서는 것을 보고 이제는 내가 하고 싶었던 일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목공, 한지공예, 도자기, 요리까지 손으로 할 수 있는 작업들을 시작하면서 내 손에 맞는 작업을 찾아 나섰고, 결국 도예는 내 안으로 서서히 녹아들어 왔다. 하면 할수록 밤을 새는 날들이 늘어가고 표현하고 싶은 조형들이 나를 채찍질하기 시작했다.”

어린 시절부터 손으로 하는 모든 작업들을 놀이로 즐겼다. 도예는 손으로 하는 자신의 최상의 선택일 뿐이다. 뭉툭한 굵은 마디로 형성된 손이 지난했던 그의 지난 흔적들을 대변한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도예에 열중한다. 무등 도예에서 공부하다 지금은 다시 대학에 진학해 공부 하는 중이고 실험적인 작품들을 시간을 두고 작업한다. 아직 무엇으로 내 색깔을 찾을 지는 미지수이지만 살아있는 동안은 아마도 도예를 도반으로 살아갈 것 같다”고 현재의 진행을 설명한다.

녹록치 않은 시간들을 보내면서도 눈을 뜨고 다시 감는 시간까지 머릿속에는 늘 도예와 함께한다. 흙이 말한다. 왜 이제야 나를 찾은 거지? 나는 지금껏 너를 기다렸어. 그리고 그의 손 안에서 작은 생명을 얻는다. 너를 기다린 보람이 있어. 너와 난 한 몸이야. 이미 보이지 않은 선으로 우리는 두 몸이 꽁꽁 묶여있어. 아무도 서로에게서 달아날 수 없어.

피어나는 꽃, 머무는 그림자

그가 작업한 도예 안에는 한 송이 꽃이 피어난다. 유약의 흐름과 가마 안의 불의 소행이라고 하기에는 가당치 않다. 치열한 그만의 계산이 숨어 있다. 옹기토에 산청토, 잡토 등, 사용할 수 있는 모든 흙들을 사용하며 이미 만들어진 유약 뿐 아니라 서로 비율을 조정해가며 스스로 만들어 사용하는 유약 속에서 자신만의 색을 찾아간다. 그 결과는 작품 안에 꽃을 피운다. 유약의 서로 어울림. 실험의 연속에서 얻어낸 그만의 꽃이다. 만개한 꽃, 이제 막 멍울을 머금은 꽃, 서로 어울리며 피어가는 꽃.

게다가 각기 선이 다른 몸매로 만들어진 사발 들을 보는 이로 하여금 자신도 모르게 탄성을 자아내게 한다. 뭉툭한 선부터, 여인의 허리 가느다란 선, 만삭의 배를 닮은 행복한 어머니의 선까지 한 가지의 선만을 고집하지 않은 채 선의 모든 종류를 직접 경험하고 만들어 낸다. 투명한 코발트 빛 청자에서 시유를 사용한 검은 빛의 자기까지 한 사람이 만들었다고 생각할 수 없는 온갖 종류들이 제각기 자기만의 빛으로 살아있다.


유전자가 서로 다른 다중인격이 그의 몸 안에 산재해 있는 것이 보인다. 그들은 한 몸 안에서 서로 서로 다른 인격으로 자기 색깔을 주장한다. 나는 청자야. 아니, 나는 다판(茶板)이야. 사발이야.

다판은 너희들을 모두 내 몸 안에 담을 수 있어 소리치고 청자는 세상 고운 빛은 내가 모두 가지고 있다고 몸으로 보여주며 세상의 모든 물을 내 안에 담을 수 있다고 사발은 졸졸 물소리를 낸다. 작가는 이 모든 다중 인격을 한 곳에 모아 다시 하나의 인격을 만들어낸다. 넉넉한 다판 위에 작은 사발 하나 찻물을 담아 두고 들꽃 한 송이 꽃아 자연을 닮은 조향을 만들어낸다. 넓은 다판 위 작가가 만들어 낸 생명들이 서로 모아져 작은 세상을 보여준다.


한 발 세상 밖으로 걸어 나온다. 다중인격이 서로 다른 목소리를 가지고 서로 다른 색깔을 보여주기 위해 서서히 걸어 나온다. 서로 모여 한 색깔이 된 인격 하나가 가까운 곳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다.

문의 : 010-3804-8540

에필로그

타인을 만날 때마다 나는 도망쳐요 / 며칠을 앓고 나니 내 가슴에 불길이 타올라요 / 이것을 어떻게 끄죠. 불을 끄기 위해 / 독한 술을 들이마셔요. 햇살은 내 삶을 / 어떻게 껴안을까 / 그들의 말 한 마디가 나에게 와서 / 혈액 속에 꽃이 피듯 천천히 독으로 퍼져요 / 독을 뿜지 않기 위해 혓바닥을 입 속에 말아 넣어요 / 온 몸에 퍼진 독을 / 밤마다 불같은 글을 종이 위에 휘갈기면 / 아무리 지우려 해도 꺼지지 않는 글씨들 / 고통이 달아날 때 / 내 글을 읽으면 모든 것이 무력해진다고 / 글자마다 독이 묻어있어 / 타오르는 불길을 들이마시며 웃는 사람들 / 천천히 죽어 가는지 모르고 /  눈물을 흘려 고통의 불길을 꺼야 해요 /  기슴을 쳐 죄의 불을 꺼야 해요 / 술이 깰 때마다 종이에 기어 다니는 글자들을 보면 / 징그럽게 꿈틀거리는 내 손을 돌로 찧고 싶어요 / 책을 읽으며 / 같은 종족을 확인하듯 형제들을 흘끔거리며 / 바닥을 기며 우는 사람들 / 그들 또한 병으로 세상을 견디겠죠 - 作 김성규. 詩 중독자.

새 책안에는 늘 푸른 날이 숨어 있다. 첫 장을 넘기면 어김없이 어리 숙한 내 살은 피를 흘리고 만다. 들어오기만을 기다렸다는 듯 단번에, 순간의 망설임 없이 손가락을 베어 문다. 시를 쓰며 많은 것을 잃었지만 동시에 너무 많은 것도 알게 되었다. 시를 쓰지 않았으면 수많은 감정의 깊이와 색깔을 알지 못했을 것이다.

또, 다른 출구를 찾아 삶을 연습한다. 눈에 감기는 푸른 길. 늙어가는 별의 그림자. 빛바랜 물감 안으로 외롭게 늘어선다. 다시는 가지 말아야 할, 그래서 갈 수 밖에 없는 길을 걸으면. 누군가 나에게 걸어온 길을 돌아가라 말하면.

문을 두드릴 땐 몰랐다. 들어선다 생각하니 앞이 캄캄하다. 나는 잊혀졌다. 그곳에서. 나는 아직도 삐걱거리는 그곳에 있고 그 복도를 떠나고 싶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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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아 2010-07-06 15:24:49
걸어. 세상밖으로 ...잘 보았습니다.
작가님의 순박한 웃음이 훍과 넘 잘어울리시고 좋은 작품 많이 보았습니다.
작품 하나하나에 작가님의 노력과 열심히 하시고 훌륭하다고 느꼈습니다.
더 많은 작품 만드시길 바랍니다.

바람부는날. 2010-03-23 21:17:39
덕택에 아이들과 함께 도자기 잘 구경했습니다..평촌갤러리 다녀왔습니다. 좋은정보 알려주어서 감사합니다.읽고 나서 평촌갤러리에 갔더니 이분의 작품도 있더군요. 기자님 작품 해설, 정말 감사합니다. 많은도움이 되었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