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전시 중인 상록 미술관에서 작가를 만나기로 한 날은 월요일. 미술관 휴관 일이었다. 늘 들락거리던 미술관 문을 밀어도 이쪽도 저쪽도 열리지 않았다. 까맣게 잊고 있었다. 매주 월요일은 전국 어디서나 국, 공립 미술관은 쉰다는 것. 다행이 찻집은 문을 열고 있었다. 작가와 마주 앉아 웃으며 이야기 한다. 나이답지 않게 동안인 웃음이 밝고 청명하다.
어쩌다 진시황제의 병마총을 오브제로 생각하게 되었는지 짐짓 모르는 척 물었다. 병마총을 처음 보았을 때, 병사들답지 않게 배가 나와 있는 것에 놀랐고, 모두 한 방향을 향해 있는 것을 보며,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현재를 바로 떠올렸다고 작가는 말한다.
맞다. 어쩌면 우리는 모두 병마총 안의 여러 가지 얼굴 형태를 하고 일정한 방향을 보고 있는 머리가 없는 병사들일 지도 모른다. 우리 모두가 자본주의를 향해, 그 일정한 목표를 향해 나아가고 있음을 부인하지 못하니까.
이곳저곳 잔디밭의 며칠 동안 혹한의 흔적을 보여주는 상록미술관에 앉아 현재 나의, 우리의 모습을 본다. 머리가 멍하다. 세월을 거슬러 무덤 속을 헤집고 온 느낌이다.
십이지는 신비이나 작가는 흥미로워
십이지가 우리 모두가 태어난 해와 연관이 있으며 각자의 해에 맞춘 띠로 된다는 것을 알았을 때는 한참 자란 후이다. 교과서 안 사진으로 만나는 십이지는 묘한 신비를 지니고 있었다. 얼핏 개념으로만 알고 있었던 십이지에 관한 이야기를 작가로부터 정확히 전해 듣는다.
십이지에 대한 개념은 이집트, 그리스, 중앙아시아, 인도, 중국, 일본 등 광범위하게 퍼져 있으나 동물로 형상화된 것은 중국 한대(漢代)이다. 중국 당대(唐代)의 문헌에는 십이지가 이미 시간의 신(神)으로 되어 있으나 당 중기에 이르러 방위신인 사신(四神)과 관련되면서 명기(明器)로 제작되거나 또는 능묘를 지키는 수호신으로서의 역할을 하게 되었다.
우리나라는 중국 당대의 영향을 받아 8세기 중엽경인 통일신라시대에 제작된 것으로 보고 있다. 통일신라시대의 십이지신상은 주로 머리만 동물형상을 한 무인(武人)의 모습으로 표현 되었는데, 점차 조각의 한 주제로 독립되면서 독특한 조형의식을 보여준다.
고려시대에는 능묘의 호석뿐만 아니라 고분벽화·석탑·석관·부도·동경 등으로 그 사용범위가 넓어진다. 조선시대에도 능묘조각은 물론이고 불화로서 십이지도무신장상(十二支跳舞神將像)이 유행하게 된다. 대표적으로는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의 납석제 뱀상과 말상을 비롯하여 성덕왕릉·원성왕릉·흥덕왕릉 등의 십이지신상이 있다.
작가는 “십이지를 보며 궁금증이 생겼다. 병마총도 역시 같은 느낌이었다. 모두 배를 내밀고 어디로 향하는 것일까. 머리를 옆으로 돌리고 왜 손에는 모두 무기를 들고 있는 것 일까하는 가장 기본적이고 근원적인 물음표이다. 내 조각은 거기에서 출발한다. 의문을 갖지 않았던 기본적인 것에서 출발한 의문은 현대와 맞물려 지금의 조각을 표현하게 만들었고 작업은 병마총 안의 병사와 십이지의 얼굴, 그리고 현대의 고뇌가 녹아들어 동양의 정신과 서양의 재료가 만나게 된 것이다”고 설명한다.
현대인의 자화상을 보다
매번 다른 작품을 작업하고 그리기를 원한다. 작가는 “한 방향의 작업을 수년에 걸쳐 업그레이드 하며 작업하는 작가들도 있다. 하지만 나는 개인적으로 매번 다른 재료, 매번 다른 느낌을 주는 작업을 하려 한다. 한 맥락으로 흐르는 것도 중요하겠지만 나는 나를 자유롭게 놓아두고 싶다. 조각으로 표현하고 하고 싶은 모든 것을 표현하고 있다고 말하는 것이 옳겠다”고 응답한다.
밝고 화려한 색들이 판에 찍혀 나온 조각들에게 옷으로 입혀져 있다. 일반적으로 잘 사용하지 않은, 어쩌면 유치할 정도의 색감들이다. 하지만 어찌된 일인지 촌스러울 정도의 색감들이 작가의 작품과는 묘한 조화를 이룬다. 적당히 밝으면서도 붕 떠 있는 느낌, 천진한 아이들이 가지고 놀면 정말 좋아할 장난감 느낌, 그리고 궁금증을 최대한 유발 시키는 각자 들고 있는 노랗고 빨간, 혹은 푸른 계통의 가방들. 촌스러움과 유치함, 궁금증들이 서로 모여 버무려져 비빔밥처럼 묘한 호기심을 유발한다. 가까이 다가가 서류 가방 안을 치밀하게 열어보고 싶은 충동을 일으키게 한다.
이리저리 둘러보다 화들짝 놀란다. 병마총 안 병정들처럼 목이 잘려 머리가 아예 없는 십이지가 작품 안에도 꼿꼿하게 서 있다. 나도 보아주라며 목소리 없이 몸으로 배를 내밀며 말한다.
55cm의 키로 견고하게 땅을 딛고 앞을 바라본다. 하지만, 한 발자국도 뗄 수 없다. 단지 마음이 바쁘고, 시간이 등을 밀어내 발자국을 떼기도 전에 밀려가거나, 끌려 갈 뿐이다. 바로 현대인들의 자화상이다.
회화성이 가미되어 녹아들어간 조각을 하고 싶어
십이지(十二支)는 육십갑자의 아랫부분을 이루는 12개의 견고한 지지대이다. 자(子), 축(丑), 인(寅),묘(卯), 진(振), 사(巳), 오(午), 미(未), 신(申), 유(酉), 술(戌), 해(亥)를 통틀어 이르는 말이다.
하지만 작가의 일렬로 세워져 있는 십이지 중에 뱀, 용, 말, 양은 없다. 머리가 없이 몸통만이 배를 내밀고 서 있다. 복제된 다른 십이지들과 다른 모습이다. 아니, 현대인의 가장 정확한 모습이다. 생각할 것, 가져야 할 것, 필요로 한 것들이 너무 많아진 현대인들은 이미 자신들의 머리 용량을 초과해버렸다. 현대인들의 머리는 이미 필요가 없어졌다. 가방 안에 서류와 할 일들만 잔뜩 들어있는 채 자신의 머리로 생각하고 기억하며 하늘을 보는 머리는 이미 없어졌다.
작가는 “현대인들의 자아를 찾아가는 과정을 보여주고 싶었다”고 작품의도를 설명한다. 더불어 “꼭 조각만을 고집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림처럼 회화성 짙은 조각도 해보고 싶다. 경계를 굳이 따지고 싶지 않다. 예술을 모두 한 가지라 생각한다”고 단호하게 말한다.
판에 박은 듯 서로 비슷하지만, 머리를 잃어가면서도 끝내 멈출 수 없는 삶에 대한 의지와 목적성을 상실한 것조차도 감지하지 못한 채 한 방향으로 물 흐르듯 나아가고 있는 현대인들의 바로 그 모습이다.
문의 : 010-6642-0157
에필로그
가려네. 불암의 산맥을 딛고서 반드시 가야 하네. 어둠의 빛으로 혹은 진실의 이름으로 빚어진 백색가면은 어떤가. 가다보면 길이 있어 광기는 시작되네. 지쳐 쓰러져 추억의 흔적마저 지워져 보이지 않을 때, 기억할 수 있으려나 // 앞서 간 사람들의 길은 보이지 않는다. 시도 때도 없이 나타났다 사라지고, 혼돈의 길을 간다. 갇혀있는 것일까. 데쟈뷰일 것이다. 바람소리마저 침묵하는 길의 풍경은 애처롭다. 고통의 심장소리밖에 설명할 수 없는 길. 멈추지 않으려네. 산을 넘으면 드러나는 가면의 시간들. 황토빛 울음으로도 다 기억할 수 없으리. 단지 들리는 건 유년의 방울소리 뿐.// 길이 있습니다. / 가야할 길과 가지 않은 두 갈래 길 / 가야할 길은 어디입니까. - 詩 채정은. 나그네에게 길을 묻는다.
손톱을 깎다가 흠칫 놀란다. 늘 긴 상태로 있었던 손톱. 아무 생각 없이 멍한 상태, 아니 너무 깊숙한 깊이로 내려가 버린 무의식. 너무 깊이 잘라 손톱 끝이 아프다.
손톱. 온 몸에서, 머리에서 발끝까지의 진액이 자란다. 수명을 다한 세포들이 손톱으로 옷을 갈아입고 자라 나온다. 잘려진 손톱들을 한 곳으로 모아 본다. 나를 본다. 날카롭게 냄새가 난다. 나는 썩어간다. 수명을 줄여가며 스스로를 파괴하고 한다. 그럴 권리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