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발령, 광주도시운명 바꿨다
단발령, 광주도시운명 바꿨다
  • 정영대 기자
  • 승인 2010.02.11 19: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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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6년 전남관찰청 광주설치 후 도청소재지 부상
일제 성거산에 신사·충혼탑 건립 군국주의 상징화

광주는 1895년 이후 상전벽해가 시작됐다. 단발령이라는 얄궂은 역사적 사건이 나주와 도시운명을 뒤바꿔놓은 것이다. 당시까지만 해도 광주는 나주부에 속한 일개 군에 불과했다. 하지만 나주는 단발령에 거세게 저항하다 나주 관찰부가 폐지되면서 쇠락의 길로 접어들었다.

반면 광주는 지방제도 개혁을 위해 1896년 도입된 13도제에 힘입어 전남관찰청이 설치되면서 도청 소재지로 화려하게 부상했다. 기존 읍성 공간에 관아가 재배치되고 신축된 것이다. 동헌자리를 꿰찬 영청(營廳)은 후일 구 전남도청사가 됐고 객사자리에는 광주군청이 세워졌다. 또 성안 곳곳에 우체사와 같은 새 관아들이 속속 들어섰다.

▲ 1970년대 금남로 확장공사 모습.

도시변화는 성 밖으로까지 전이됐다. 1992년 발간된 ‘광주도시계획연구’는 “읍성 서문(光利門) 밖 광주천변에 호남을 대표하는 큰 장과 작은 장이 번갈아 서고 그 주변에 주거지가 형성되어 있었다”고 기술하고 있다.

1872년 제작된 지방지도에도 광주읍성 서쪽 성곽 밖과 광주천 사이에 두 곳의 장시가 표시돼 있다. 서문을 기준으로 위쪽에 위치한 작은 장시는 현 녹십자 병원일대였고 아래쪽 큰 장시는 현 수기동 현대극장 앞 둔치 일대에 있었다. ‘동국문헌비고’도 18세기 후반 이미 광주에는 큰 장과 작은 장외에도 서창장, 대치장, 신장, 선암장 등 모두 6개의 장시가 열리고 있었다고 전하고 있다.

광주는 1897년 목포항 개항으로 변화의 외풍(外風)을 맞는다. 일본 승려를 시작으로 미국 개신교 선교사들이 들어와 외국인 거주지를 형성하고 신교육을 시작한 것이다.

특히 1904년 광주에 온 미국인 선교사 유진 벨과 클레멘트 오웬 등은 서문 밖 광주천 너머 양림동에 선교촌을 형성했다. 이들은 1905년 읍성 북문 안쪽 군사훈련장 자리에 ‘북문안 교회’를 세우고 숭일학교와 수피아 학교를 건립해 근대교육의 기틀을 다졌다.

반면 일본인들은 광주 친일파 관료들의 도움으로 서문 밖 비교적 입지가 좋은 곳에 정착했다. 이들은 광주천변 보작촌(현 황금동과 불로동) 일대에 유곽을 형성하고 성안의 본정통(현 충장로)을 장악하는 거점으로 활용했다.

현 황금동 교차로는 옛 광주읍성 서문자리에 해당된다. 일제가 광주읍성의 성문과 성곽을 해체한 자리에 격자도로를 만든 것이다. 황금동에 모텔과 유흥주점, 음식점이 즐비한데는 다 이유가 있었다. 광주읍성 해체 후 일본인들이 점유했던 유곽의 역사 때문이다.

일제는 1909년 광주경찰서를 세우고 1910년 광주~목포 간 도로 완공에 맞춰 제1단계 도시화 계획에 들어갔다. 도시화 사업은 일제를 배경으로 1911년 결성된 ‘광주번영회’가 주도했다. 기실 광주번영회의 설립목적은 광주보다 일본인들의 번영과 이권보장에 맞춰졌다.

‘광주시사’에 따르면 번영회는 도시화를 위해 크게 세 가지 사업을 펼쳤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구강공원(현 광주공원) 조성, 각 등급의 도로개수, 시구개정과 광주면의 성립 등이 그것이다. 구강공원은 1913년 성거산(聖居山)에 건립됐다.

성거산은 예로부터 광주사람들에게 광주를 보호하는 성스러운 영적 장소였다. 하지만 일제는 이곳에 신사를 건립하고 전몰자를 기리는 충혼탑을 세워 일왕과 일제를 기리는 상징적 장소로 바꿔놓았다.

광주의 식민도시화 1단계 사업은 1916년 북문 밖 공북루가 철거되면서 완료됐다. 일제는 1917년 광주면제를 시행하면 도시행정제도의 수술에 들어간다. 1917년 만들어진 ‘광주시가도’를 보면 오늘날 광주 구도심 지역의 시가지 윤곽이 드러나 있다.

▲ 전남도청을 중심으로 한 시가지 전경

일제는 초기 식민도시화를 바탕으로 1920년대 ‘대광주건설계획’을 추진하게 된다. 이때부터 광주가 오늘날과 같은 시가지의 기본골격을 갖추게 된다. ‘광주-도시의 생성과 발전’(김광우)은 “이 무렵부터 확장전의 금남로, 광주공원과 사직공원, 광주천변 좌우도로, 도심의 상하수체제와 현재의 지번체계 등이 성립되고 구 시청사 및 광주시 구 심벌마크 등도 이 때 비롯된 것”이라고 적고 있다. 

일제는 1937년 중일전쟁 무렵 광주 시가지 동쪽과 서쪽 끝에 공장을 유치해 공업지대조성을 계획했다. 1935년 광주가 대전, 전주와 함께 부(府)로 승격되면서 이뤄진 결과였다. 일제는 1939년 ‘광주시가지계획’을 통해 광주를 대규모 상공업 도시로 확장계획을 세웠지만 태평양 전쟁으로 실행되지 못했다. 해방 후에도 광주는 경부축을 중심으로 한 발전전략 때문에 불균형과 소외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해방 후 광주의 변화의 바람은 1969년 경양방죽을 매립한 자리에 시청사가 신축되면서 시작됐다. 원래의 시청사는 1924년 동구 광산동에 들어선 광주면사무소로 1943년 증축됐었다. 광주는 이후 1986년 11월1일 부산, 대구, 인천에 이어 네 번째로 직할시로 승격됐다. 이때까지만 해도 광주의 도시공간은 구 도청을 중심으로 한 단조롭고 평면적인 구조였다.

하지만 상무지구 신도심이 개발되면서 도시기능이 다핵화되고 2004년 시청사 이전과 이듬해 전남도청의 남악신도시 이전으로 ‘호남행정중심도시’로서의 역할을 마감하고 새로운 전기를 맞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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