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필로그
갤러리에서 보내져 온 이메일을 확인하다 멈칫, 한없이 이미지를 들여다본다. 낯익은 이미지이다. 우리네 선조들이 도구로 사용했던 지게. 그리고 그 위에 온갖 색들을 갖고 있는 한지를 잘라 걸쳐 놓은 듯한 작품. 화려하면서도 잔잔한 묘한 매력이 있다. 작품을 들여다보고 보며 한지일까? 한지 이미지가 분명해. 단정하다가 결국은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갤러리로 향한다.
전시 오프닝. 작가를 갤러리에서 처음 만난다. 전남대 졸업 후 성신여대 대학원 판화과를 수료, 현재는 프랑스에서 체류 중인 작가이다. 밝고 유쾌한 표정. 작업에 대한 열정이 가득 차 멀리서도 통통거리는 맑은 소리가 들린다. “고향인 광주에서 정말 멋지게 전시하고 싶었는데, 운송과정에 문제가 있어 대작은 반입도 못했다. 관람객들에게 미안할 뿐이다”고 말문을 연다.
온통 아름다운 색이다. 작가가 통통거리며 튀는 이유를 알겠다. 하고 싶은 말이 많다. 여전히 듣는 쪽이긴 하지만 찬찬히 둘러보니 시간의 흐름이 보인다. 삶의 흔적도 더불어 보인다. 그림 밖에 위태하게 붙어있는 새에게 조용히 말을 걸어본다. 많이 힘들고 외로웠구나. 낯선 곳에서 스스로 살아남기 위한 최선의 선택이었구나. 새가 돌아보며 대답을 한다. 하지만 아직 갈 길이 멀어. 앉아있기 보다는 저 그림 안으로 날아들고 싶어.
떠먹는 그림, 평면에서 해체된 그림
넓은 갤러리 안, 작가의 작품은 벽에 걸려 있다. 아니, 설치되어 있다는 표현이 맞다. 그림이 평면 밖으로 튀어 나온 작품이 더 많다. 회화는 분명 회화인데 일반적인 평면 회화가 아니다. 이미지를 보며 단정했던 한지도 아니었다. 캔버스 위에 덧칠해진 중첩된 아트릴릭이 전부였다.
온통 날카로운 금속을 이용해 잘린 캔버스 천들은 허공을 향해 매달려 있기도 하고 바닥을 향해 무심하게 늘어트려 있기도 한다. 벽에 부착 된 나무 선반 위, 작고 앙증맞은 컵 안에 색색 고운 가루들이 고체처럼 덩어리 윤곽을 하고 담겨져 있거나 유리컵 없이 스스로 모양 갖추고 엎어져 있다. 그리고 바로 옆, 작은 티스푼 하나 전혀 낯설지 않은 모습으로 놓여 있다. 그림을, 색깔을 먹으라는 것이다. 완전하게 떠먹는 그림이다.
보면 볼수록, 의도를 읽으면 읽을수록 작가의 내면이 궁금해져 오랜 시간을 나오지 못하고 갤러리 안을 흐느적거리며 그림 속에서 놀기로 한다. 투명 비닐 안에도 작가의 마음이 담겨있다. 고체의 형태도 유리컵을 이용하지도 않은 가루들이, 투명 비닐 안에 색색으로 담겨져 눈을 황홀하게 한다. 색깔이 색깔 그대로 감동을 줄 수도 있구나, 그림이 될 수 있구나 감격한다.
“처음 작업은 그저 평면이었다. 평면의 캔버스는 내게 너무 무거웠다. 잘 그리려고 하면 할수록 그림은 내게 감당할 수 없는 어떤 것으로 무겁게 다가왔다. 한 때는 퍼포먼스를 하기도 했다. 온 몸으로 풀고 나면 한편으로는 후련하기도 했지만 여전히 갈증은 심했다. 결국 나는, 내 내면 안에서 그림을 지우기로 마음먹었다. 신기하게 그림을 지우자 그림은 다시 내게 손을 내밀었고 붓을 들게 했다. 결국, 평면을 버리고 다시 평면으로 돌아온 것이다”
평면 회화로 시간과 공간의 흐름을 나타내
작가의 웃음처럼, 혹은 작업의 열정처럼 작품들은 끈기를 가지고 있다. 밝고 화려해 보이는 각각의 작품들이 사실은 에스키스를 통한 첨단의 기억과 흔적을 이용한 작업이다. 달리 붓을 이용해 조형하거나 형태를 만들지도 않았다. 그런데도 작업은 들여다볼수록 강인해 보이고 내면의 열망을 돋보인다.
빨갛고 노란, 혹은 완전 초록이거나 온갖 아름다운 색들로 덧칠 되어 있다. 작가는 “한 달, 두 달 동안 아크릴릭을 칠하고 다시 칠하는 중첩만을 하고 있을 때도 있다. 다시 그 작업이 끝나면 또, 한 달, 길게는 두세 달 중첩된 0.5mm~1cm 두께의 이미지의 캔버스를 긁어내거나 자르고만 있는 나를 발견한다”고 고백한다.
맞다. 작가의 작업은 아주 어릴 적 우리 모두가 한 번쯤은 모두 해보았을 스크레치를 닮았다. 단지 다른 점은 우리가 한 재료는 크레용이었을 뿐이다. 자신이 칠하고 싶거나 좋아하는 색깔을 골라 하얀 도화지 위를 칠하고 다시 그 위에 다른 색을 칠하고. 몇 번을 반복하고 나면 못이나 핀 같은 날카롭고 뾰족한 도구를 사용해 그 위를 긁어내며 자신이 표현하고 싶을 것을 그렸다. 그래. 기억이 난다. 옷이나 팔꿈치, 손바닥과 손톱이 온통 크레용으로 범벅이 되고 나서야 그 작업은 끝을 내곤 했다. 아마 작가도 그랬을 것이다.
작가의 작업도 일반적인 스크레치와 일맥상통한다. 단지, 우리는 하고 싶은 대로 했던 것이 작가와 다를 뿐이다. “치밀한 계산을 한 후, 예를 들면 색과 색이 중첩되고, 중첩된 색들이 어느 깊이와 넓이로 조각을 해야 그 색들이 온전하게, 서로 같지만 다르게 보일 것인가를 늘 염두에 두며 작업한다”고 과정을 설명한다.
사회를 향한 목소리를 화폭 안에 담고 싶어
“지극히 개인적인 작업보다는 이 시대를 살아가는 한 구성원으로 내 목소리를 내는 작업을 하고 싶다. 작업의 궁극적인 목표이다. 자기만족 보다는 사회가 원하고 그 흐름을 읽어낼 수 있으며 같이 호응하는 작업, 그래서 늘 무엇을 어떻게 전달 할 것인가를 고민한다”
그런 의미에서 작가는 자신만의 보석상자인 평면 회화를 철저히 지웠다. 그림을 그리려 하지 않자 훨씬 가벼운 무게로 그림은 다가왔다. 내면의 목소리에 기울이며 차곡차곡 물감을 쌓아가 그림 층이 오히려 형성되어 갔다. 결국 그림을 버리고, 자르고, 긁어내며 가루로 변화되어가는 평면 안에서 작가는 자신만의 목소리로 우뚝 섰다.
작가의 작업은 여전히 해체 중이다. “가루 역시 시간의 연속이다. 조각칼을 사용해 그림과의 전쟁을 치르다 보니 언제부터인가 평면 안에 그림으로 화해있는 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그림의 흔적을 발견하고 가루를, 다시 말하면 흔적을 찾아 그림을 떠먹기도 하고, 다시 고체로 만들어 그림이 평면만이 아니라 불사조 같은 생명의 영원함이 있다는 것도 알았다. 그림 밖, 간간히 보이는 새는 다시 말하면 회화의 불사조이다”
7년 만에 다시 찾은 광주에 대한 연민도 많다. “프랑스에는 광주에서 온 작가가 더러 있다. 물론 나름의 작업을 인정받고 있다. 프랑스 작가들을 광주를 대단히 경이롭게 생각한다. 5.18민중항쟁이 그렇다. 아시아문화중심도시를 꿈꾸며 비약해가는 광주를 또한 누구나 방문해보기를 원한다. 나는 프랑스 파리에서 광주와 파리를 이어주는 작가의 가교 역할을 하고 싶다”고 말하는 작가는 이미 한국 청년작가들의 판화전시가 파리에서 2월 중 예정되어 있다.
일시 : 1월30일(토) 까지
장소 : 유·스퀘어문화관 금호갤러리
문의 : 010-2035-7130
에필로그
감기 고뿔 / 사랑도 그렇게 왔으면 좋겠다. / 저항할 수도 없이 / 열에 들뜨고 어지러워서 / 빗물에 젖은 골목길 어둔 구석 담장에 / 이마를 대고 울어봤음 좋겠다 / 한 며칠을 울다 감기처럼 슬그머니 나를 놓아줬으면 좋겠다 / 그 사랑 눈에 보이지 않는 딱지 가슴 한켠에 묻어두고 / 가을 햇살 속으로 걸어갔음 좋겠다 / 감기 그것처럼 사랑도 쉬 왔다 얼른얼른 떠나가면 좋겠다 - 詩 한보리. 감기
일주일 넘는 시간, 탑을 쌓는다. 망각, 굴욕, 막막함, 허망, 그리고 망루. 쌓았던 탑들을 다시 산산이 부수고 그 파편들에 스스로 찔린다. 내 안에서 사라지지 않은 기억들이 부딪히고 깨져 온 몸 핏줄이 엉켜 상처를 만든다. 이제는 괜찮다고 달래도, 견딜만 하다고 가만히 두어도 온 몸이 아프다. 버려진 것들 온 몸으로 받아 시커멓게 폐기된 내 몸이다. 내 안의 삭정이 하나 툭! 부러진다.
날마다 나를 온전하게 바라보고 앉아 나를 지운다. 사람 사는 일 아무것도 아니다. 울지 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