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t - Existence
Dot - Existence
  • 범현이
  • 승인 2009.12.18 20: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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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으로 흔적을 기록하는 작가 안승민(47)

▲ 안승민 작가.
프롤로그

몇 년 전 작가를 처음 만났었다. 다시 만난 작가는 많이 편안해져 있었다. 축축하고 눅눅했던 작업실. 장마철, 작업실 여기저기 산재한 푸른곰팡이 같았던 우울한 모습은 사라지고 다시 태어나 허락받은 시간을 즐기고 있는 사람처럼 밝고 건강한 웃음소리를 내었다.

밝아져서 좋아 보여요……. 하는 말에 작가는 지하에서 지상으로 올라오니 세상이 달라 보인다. 내가 그랬나?.. 하며 웃는다. 작업실은 깔끔하고 진공관을 통한 클래식이 기분이 좋을 정도로 잔잔히 흘렀다. 편안한 기운이 감돌았다.

비엔날레 관 바로 앞. 작년 광주 비엔날레 기간 뿐 아니라, 올 디자인 비엔날레까지 많은 날을 비엔날레를 보러 왔지만 작가가 이곳에 자리하고 있는 줄은 정말 몰랐다. 때때로 생각이 나기도 했었다. 많은 작가들이 얼굴을 보이며 활동을 하는 사이사이, 단 한 번도 얼굴을 보여주지 않아 궁금증은 더해갔었다.

올 들어 가장 춥다는 날. 작가를 만나러 간다. 약속시간보다 너무 빨리 도착한 후 전화 통화가 되지 않아서 들른 곳은 세차장. 덕택에 실내까지 세차를 했다. 차가 오랜만에 본래의 색을 찾았다. 깨끗해졌다.

점 - 세상의 가장 근원, 세상의 모든 것

작가의 작업은 점묘법으로 일관된다. 점묘법. 미술용어 사전을 찾아보면 <점, 또는 점과 유사한 세밀한 터치로 묘사하는 회화기법의 용어로 점태묘법(點態描法)의 약어>라고 쓰여 있다.

“세상의 모든 사물 뿐 아니라 주변 환경, 생명을 유지하는 모든 생물들까지 점으로부터 시작한다. ‘dot’ 혹은 ‘point’라고 한다. 점으로 시작한 점들이 모여 선을 이루고 다시 면이 된다. 내 작업의 기초는 삶의 가장 작은 단위, 시간의 편린들이다. 이것을 점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작가는 91년 전남대 예술대학 재학 중 프랑스로 떠났다. 자기만의 색을 찾아 떠나는 긴 여정이었다. 프랑스 앙제 도립미술대학, 더 정확히 말하면 프랑스 앙제 고등 조형 미술학교를 졸업하고, 학위 취득 후 비로소 선택할 수 있는 전공 선택에서 맞닥트린 것이 점묘법이었다.

작가는 잘 그려진 ‘보여 지는 그림’ 보다는 자기 철학이 있는 ‘성찰의 그림’을 작업한다. 하얀색의 빈 캔버스를 이젤에 세워두고 작가는 점 하나를 찍기 위해 집중한다. 에스키스 해 둔 머릿속 스케치를 정밀하게 계산해가며 자신만의 점을 찍어간다. 100호 이상 가는 캔버스에는 크고 작은 수많은 점들이 셀 수 없이 무수히 찍혀져 있다. 점으로 농담을 조절하고 원근도 표현한다. 익숙한 몇 가지 색을 혼합해 자기만의 색을 이용한다. 한 달 이상이 넘어야 비로소 작품 한 점이 완성되는 작업이다.

점 - 가장 원초적인 실존을 나타내는 생명

점 하나마다 고유의 유전자를 가지고 있다. 작은 점, 원소들이 모여 커다란 생명을 만들어 낸다. 한숨과 눈물, 과거의 편린, 시간의 흐름, 유한과 무한, 늘 들이마시는 산소까지 점 하나에 들어 있다. 이 점과 점들이 모여 선을 만들어내고 다시 면을 만들고, 꽃을 만들고 양초를 만들어 낸다.

지금은 화사해졌지만 예전의 작업들은 필름을 보는 것 같은 흐름을 나타내는 어둡고 습한 색이 주조였다. “존재는 생명을 뜻하고, 생명은 늘 진화하며 변화해간다. 내가 그림에서 표현하고 싶은 것은, 점으로 이루어진 과거 뿐 아니라 앞으로 다가 올, 곧 만나게 될 예기치 못하는 시간들도 포함되어 있다. 예전 작업들이 과거의 편린들이었다면 현재 작업하고 있는 것, 또, 앞으로 작업하고 싶은 것들은 미래에 다가올 희망적인 것들이기에 밝은 색을 주조로 작업 한다.”

점을 찍으며 많은 것들을 생각한다. 늘 겪어내도 새롭게 다가오는 변화, 시시각각 피었다지는 꽃, 시간을 나타내며 달라져가는 사람들의 주름살, 스스로를 녹여가며 밝은 환경을 만들어주는 양초 등 실존을 그려내려 노력한다. 작가는 그 안에서 웃고 울며 시간의 흐름을 점으로 표현해내는 것이다. 점 하나가 작가의 삶 속의 시간 조각 하나인 이유이며, 점 하나가 실존인 이유이다.

“우리는 하루(日)와 한 주(週), 그리고 한 해(年)의 개념 속, 정해진 공간 안에서 살아가고 있다. 만약 누군가 삶의 개념을 하루, 한 주, 한 해 중에서 선택하라면 나는 하루를 선택할 것이다. 왜냐면 그것은 삶 중에서 가장 작은 요소이기 때문이다.”

일상의 소소함을 일기를 쓰듯 점으로 찍어내고 상대를 보며 그 안에서 ‘자신’을 바라본다. 상대를 보는 것이 삶의 기록이며 자신을 보는 ‘내 존재를 확인하는 작업’이다. 점을 찍어 가면서 존재의 소멸과 자신이 살아가는 삶, 사회의 모든 것들을 구성하고 있는 존재 이유를 깨달아 간다.

각자의 다양성을 인정한 삶의 치열한 기록

“내가 존재했던 여러 장소, 만났던 이들의 모습이 내 삶을 이룬다. 삶의 공간을 사랑하고 그들의 삶 또한 사랑하기에 24시간 안에 존재한 공간과 만났던 그들의 모습을 화폭에 담는다. 다시 말하면 내 존재를 확인하기 위한 몸부림이다”


점 하나는 나를 거쳐 간 시간과 공간을 나타내는 기억을 뜻한다. 캔버스에 씨줄과 날줄처럼 표현되어 있는 수평선과 직선은 평면의 하루와 시간을 나타낸다. 작은 시간과 하루라는 공간들이 모이고 모여 형상이 만들어지고 그림이 된다.

완성된 그림은 몽롱하다. 그것 역시 계산되어진 작업의 일환이다. 멀리 바라보아야 그림이 주는 의미를 알아낼 수 있다. 과거의 조각들이 모자이크처럼 서로 맞붙어가며 바로 바라볼 수 있는 것은 시간이 경과된 시점이다. 어제의 일들은 기억은 할 수 있으나 문제에 대한 시각은 올바르지 않을 수도 있다. 시간이 흘러 공간성이 가미되면 바로 보는 진실의 문의 열리고 올바른 건강성을 찾아낼 수 있다. 작가가 의도한 의도성은 몽롱함을 보여줌으로서 더 멀리, 더 시간을 지나야 바라볼 수 있다는 기억의 특징이다.


그 모든 것들은 ‘존재’라는 이름으로 그 자리에 있다. 불확실하지만 그 자리에 텅 빈 모습으로, 언젠가 내가 앉았던 기억을 담은 채로 지키고 있다. 순간적인 기억의 순서가 사물을 처음 볼 때와 다시 기억을 떠 올리며 지나는 방향으로 이어지는 사물의 각도는 다르다. 그는 그 ‘순간’, 그 ‘찰라’를 카메라에 담고 아크릴로 그린다. 작가가 작업하는 점들로 생명력 있게 다시 태어난다. 작가만의 점묘법이다.

작가는 프랑스 서부 지역 작가부문 대상을 비롯하여 프랑스 내셔널 작가부문4등상, 오피시엘상, 신세계미술제 등을 수상했으며 프랑스 앙제 도립학교, 성보박물관, 우제길 미술관 등에 소장되어 있다.
문의 : 010-7306-7790

에필로그

길도 없이 웅성이며 흐르듯, / 바람 같은 흔들림이 있었다 / 가지치기를 하듯, 담긴 것들을 / 쏟아 버린 후에도 갈망은 더해갔다 / 지친 몸으로 허겁지겁 잠든 밤에는 / 몽정처럼 끈적끈적하고 강렬한 꿈을 꾸었다 // 난 소리 내지 않은 종(鍾)이었다 / 단지 흔들림으로 / 울어 보이는, / 난 목마르지 않은 밤이었다 / 단지 엷은 바람으로 / 산책을 하는, / 난 잠들지 않은 새벽이기도 했다 / 깨어나지 않은 꿈 속 / 쉼 없이 길을 재촉하는,// 흔들리는 일상의 꿈에서 깨었을 때 / 난 다시 꿈꾸기 위한 / 절망으로 / 하루를 시작 한다 - 詩김준철. 깨어나지 않는 꿈.

문자가 왔다. 창밖을 바라 봐.. 모르고 있었다. 제법 쌓인 눈이 아직도 함박눈을 뿌린다. 또, 한 해가 가려한다. 출구를 뒤에 뒤고 여전히 허둥거리고 있는 것이 보인다. 눈을 넘어 아른거리는 광야, 바다를 보고 있다.

삶은 여전히. 늘. 내 생각처럼 흐르지 않았다. 멈춰있고 싶은데 등을 밀어대고, 앞으로 나가고 싶은데 털어버릴 수 없는 것들이 발목을 잡고 길은 오히려 막히기 일쑤였다. 늘 '시작'이 '다시'로 변경되었다. 어쩌면 산다는 것은 오래전의 상처를 기억하고, 그 흉터 위에 같은 상처를 쌓아가면서 이번에는 아프지 않다고, 금방 아물거라고, 혹은 그 상처 자체를 상처가 아니라고 우기면서 가는 게 아닐까.

세상은 늘 그 자리에서 다시 시작하지만, 끝내 그 어디에도 다다를 순 없다. 가는 곳까지만 길일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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