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리고 담다’
‘오리고 담다’
  • 범현이
  • 승인 2009.12.11 20:5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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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체드로잉으로 소통하는 작가 조수경(47)

▲ 조수경 작가.
프롤로그

하루 내내 겨울비가 내렸다. 몇 년 동안을 지켜본 작가이다. 황토 드로잉에서부터 나이프드로잉을 거쳐 드디어 자신의 색깔을 찾아낸 작가를 반가운 마음으로 찾아간다.

터미널 근처. 예식장이 많기로 소문난 곳이다. 플래카드가 여기저기에 걸려있다. 한 쪽에서는 ‘아침이슬’과 ‘임을 위한 행진곡’ 노래가 쉼 없이 흘러나온다. 저 노래들을 어떻게 알았을까 싶을 연배의 어르신들이 모여 농성 중이다. 띠도 깜찍하게 둘렀다. 예식장 사이로 장례식장이 들어온다고 하는 농성이다. 세상은, 시작은 언제나 여리고 순하게 받아들여지지만 마무리는 그 누구도 책임지지 않으려하는구나 하는 생각을 해본다. 삶과 죽음이 모두 한 몸인데 우리는 죽음을 너무 멀리만 두려한다. 아직은 받아들일 준비가 되지 않아서일까.

낡은 아파트 상가 계단을 오르자 그곳에 작가가 웃으며 문을 열어준다. 작은 작업실 안, 나무를 태우는 난로에서 빨갛게 타고 있는 불꽃만큼이나 고소한 군고구마 구워지는 냄새가 그득하다. 맞다. 점심을 놓쳤다. 갑자기 허기가 진다.

모든 실험 작업을 거쳐 찾아낸 자신만의 드로잉

사면을 둘러 싼 벽에 각기 다른 재료와 조형을 한 작품들이 걸려있다. 주의를 기울이며 작품을 깊숙이 들여다본다. “너무 어지러져 있어 부끄럽다. 작품을 제대로 볼 수가 없을 것이다”며 작가는 작품들을 일일이 들고 와 바로 눈앞에 세워준다.

모두 다른 선, 각기 형태를 달리한 조형, 산만할 정도의 다양한 재료들이 서로 어우러져 묘한 혼합의 미학을 만들어낸다. 작가는 “50여 가지가 넘도록 실험을 한 결과이다. 나이가 나이니만큼 지치기도 할 만한데 난 아직도 실험이 즐겁고 행복하다. 아직 고통이 덜한가보다”며 설핏 웃음을 웃는다.

▲ 드로잉 작품.

거의 모든 작업의 기본 모태는 ‘드로잉’이다. 많은 작가들이 가장 힘들어하며 어려워하는 드로잉. 드로잉(drawing)은 주로 선에 의하여 어떤 이미지를 그려 내는 기술이다. 색채보다는 선(線)적인 수단을 통하여 대상의 형태를 표현하는 데 중점을 두는 섬세한 작업이다.

▲ 서산초등학교 근처를 드로잉한 작품들.

들여다볼수록 작가의 드로잉은 선이 굵다. 핸드 페인팅부터, 황토 드로잉, 염색 드로잉, 나이프 드로잉, 최근에는 찻물을 조려가며 자연색 그대로를 채색하는 기법의 드로잉까지, 손으로 할 수 있는 모든 드로잉을 거쳤다.

▲ 나이프드로잉 작품.

“하다보면 작업이 또 다시 드로잉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웃음이 나올 때가 많다. 아직도 드로잉을 하고 있다면 사람들이 웃을까?”

대부분의 작가들이 그렇지만 드로잉은 대학 재학시절 가장 많은 선들을 에스키스 한다. 인체 드로잉으로 1분, 3분, 5분 드로잉까지 짧은 시간 안에 주제를 나타내는 반복적인 훈련인 셈이다. 이것이 익숙해지면 드로잉 북을 들고 들로 산으로 스케치가기도 한다.

▲ 작품명 <낙화>.

인체 드로잉의 다양한 맛 - 드로잉으로 만들어진 세상

2008년 작가는 나이프 드로잉으로 세상과 소통을 시도했다. 아주 어린 시절 색종이를 곱게 접어 모양을 그리고 칼과 가위로 무늬 결을 따라 형태를 만드는 작업에서 비롯된 나이프 드로잉이다. 칼과 가위만 있으면 모든 종이들이 작가의 손 안에서 드로잉이 된다. 선, 하나 어슷거리지 않고 순하게 자르고 오려가며 작가만의 세상을 창조한다.

▲ 가위드로잉 작품.

산도 오리고 바다도 오리고, 집도 굴뚝도, 그곳에서 살아갈 사람들도 섬세하게 오려간다. 날선 칼과 가위로 만들어진 세상은 작가의 집이 되고 산이 되고 마음까지 오려 담아 넣어진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에 열중한다. 결코 혼자서는 살아갈 수 없는 사람들 사이에서 보이지 않은 끈으로 연결된 인연들까지 군상으로 오려낸다. 서로 손을 맞잡고 있지 않지만 서로 돌아보지 않아도 연결되어 있는 가느다란 씨줄과 날줄로 연결되어 있다.

▲ 작품명 <군상>.

▲작품명 <어미>.
작가는 다시 새로운 작업에 들어선다. 차를 오랫동안 끓이고 끓여 졸여진 찻물로 드로잉을 시도한다. “3년 전 엄마가 돌아가신 후 엄마가 입었던 한복들을 해체해 그 흔적을 찾아가는 여행을 시작했다. 작업하는 캔버스 천들로 엄마의 한복들을 모양대로 잘라 이용하고 있는 것이다. 실크나 공단 위의 자연스러운 질감을 그대로 유지한 채, 그 위에 엄마의 냄새를 각인해 가는 작업이다”고 설명한다.

한복 천위의 고유의 문양들을 그대로 둔 채 그 위에 찻물을 이용해 드로잉을 해간다. 군상이다. 날아가고 있는 사람, 바닥에 그대로 서 있는 사람, 서로 보이지 않은 끈으로 묶어져 비슷해 보이는 사람들까지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를 그려가는 군상 작업 드로잉이다.

엄마의 실로 한 땀 한 땀 실로 군데군데 바느실도 한다. 중심을 잡는 일이다. 드로잉을 하는 캔버스 아래는 솜을 덧대어 푹신하다. “엄마의 사랑, 포근한, 편안함, 넉넉함 등을 표현하고 싶었다”고 말한다.

작가는 2010년 5월, 무등미술관 공모전에 당선되어 드로잉 전시가 예정 되어 있다.

에필로그

어렸을 때는 생각했지 / 사람들은 견딜 수 없는 슬픔을 참고 / 어떻게 살아갈까를 / 나이 들어서 깨달았지 / 시간은 그 슬픔들을 참는 지혜를 베푼다는 걸 /  또, 한 때는 생각했지 / 결국은 고통과 비극으로 끝나는 이 여정을 / 왜 악착스레 걸어가야 하는 건가를 / 시간은 가르쳐주었지 / 왜 살아야 하는 것인가가 아니라 / 당연히 살아야 한다는 것을 // 보라 / 이 세상에 가득 찬 동식물이며 / 보석처럼 찬란한 무수한 별이 / 자신의 죽음을 슬퍼하던가  - 詩 유자효. 아들에게

머리에 등불이 켜지고 가슴에 별빛이 죽는다. 백가지 색을 지우고 나니 백지가 된다. 절며  절며 마음에 울을 치고 백치가 된다. 깊은 상처의 길이 사라지고 빈 집에 굶주려 바람에 흔들리는 마음 하나 그 아래 누워 있다.

답답한 가슴에 못을 치는 소리. 적막이 홀로 막막하게 아픔을 지운다.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세상 한 켠에 갇혀 잠 속, 꿈 속 잠 속에서 잠들고 싶고 꿈꾸고 싶어도 잠 못 들고 못 꾸는 겨울은 깊어.

아무리 달려가도 네게 닿지 못하고, 아무리 소리쳐도 네게 들리지 않았다. 눈 먼 가슴에 별이 뜨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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