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진강. 아침 고요’
‘섬진강. 아침 고요’
  • 범현이
  • 승인 2009.12.05 00:55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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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진강에서 역사를 그리는 작가 송만규(53)

▲ 송만규 작가.
프롤로그

그림으로만 만나던 작가를 다른 작가의 전시회에서 만나 수인사를 나누었다. 반가웠다. 곱슬머리. 선해 보이는 깊은 눈빛. 하얀 피부. 나이를 가늠할 수 없는 웃음. 부드러운 말투. 기억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근 한 달이 지나서야 받아들었던 전화번호로 통화를 하고 채근해  억지로 약속 날짜를 받는다.

낮고 야트막한 야산과, 이파리 하나 남김없이 떨어진 가지들만이 무성한 나무들을 보고 또 보며, 11번, 12번, 17번, 23번 지방 국도를 따라 서둘지 않고 천천히 다가오는 겨울을 느낀다. 창을 열고 손을 내밀어 바람을 만져보기도 한다. 바람의 깊이가 느낌으로 전달된다.

전북 순창. 그곳에 작가의 작업실이 있다. 아니, 남원에서 더 가까운 곳이다. 산 아래에서 중턱까지 좁다란 돌담길로 연결된 작은 마을이다. 돌담 사이로 사람 사는 냄새가 난다. 온통 시간이 멈추어 있는 곳. 돌담이 즐비한 마을 중턱, 손을 흔들며 작가가 거기 서 있다. 하늘은 놀랍도록 푸르고, 발아래로 보이는 마을의 기와들을 지나 흔들리며 흐르는 섬진강이 거기 보인다. 하늘과 땅이 맞닿아 있다. 바람과 물이 한 몸으로 흐른다.

길 위의 함성은 삶의 깊이를 선물해

작가는 70년대 기독교 단체의 인권 운동을 시작으로 민중미술운동에 들어섰다. 민족민중미술운동전국연합(민미련)의 창립을 주도하고 홍성담과 함께 공동의장으로 활동했다. “광주민중항쟁 때는 현장운동가였다. 농민운동, 공단 노동자들과 연대해 민중미술이 태동했고 이것은 최열, 홍성담을 만나게 해 결국 같이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이야기를 시작한다.


“민중미술 운동은 기층 계급운동과 같은 선상이었다. 인간 됨됨이를 회복하기 위한 운동이었다. 민족자주, 민족 해방 운동은 결국 인간과 인간이 엮어지는 운동이고, 이것을 그림으로 표현하고 소통한 것이 민중미술이다.”

문민정부가 들어서고 다시 참여정부로 이어지면서 작가의 작업은 길 위의 함성에서 내면으로 들어온다. 오랜 시간 침잠한다. 작가는 “앞만 보고 활시위를 당기듯 팽팽하게 지나 온 시간들을 되돌아 볼 시간이 필요했다. 그동안 내 안에 있었던 것들이 구호나, 함성, 민중, 자주만이 아니었다는 것도 깨달았다. 이 모든 것이 녹아들어 결국 ‘무위자연(無爲自然)’임을 알아가는 시간이기도 했다.”고 고백한다.


더불어 장자의 ‘조탁복박(雕琢復朴)’도 이야기 한다. 조탁이란 연장으로 새기거나 깎거나 쪼는 일을 말한다. 조탁복박이란 장인들이 세공을 할 때 끌로 새기거나 칼로 깎으며 손질을 하더라도, 결국 아무런 장식을 하지 않은 듯한 순박한 모습으로 돌아가는 것이 진정한 물건이라는 뜻이다. 처음에는 물론 연습을 해야 하지만, 연습을 통해 화려한 그림을 그리는 동안에는 아직 참다운 경지에 이르지 못한다. 한 걸음 더 나아가 평범하면서도 꾸밈이 없는 경지로 돌아가야 한다. 모든 것을 경험하고 일을 수행해도 결국에는 무엇에도 얽매이지 않은 채 소박하고 평범한 사람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작가는 말하고 있다.

무위자연 안에서 새롭게 만나는 세상 - 역사의 섬진강

‘무위자연’이란 꾸밈없는, 자연의 순리에 따른 삶을 산다는 말이다. 여기서 무위(無爲)는 인위(人爲)의 반대 개념으로 의도적으로 만들고 강요해 그것을 지키면 선이고 그렇지 않으면 악으로 간주한다. 무위의 반대 개념인 인위는 공자의 유가 사상을 말 한다. 노자가 말한 무위자연은 개인적인 삶의 기준이 아니라 유가의 인위적인 통치에 반대하는 말이기에 국가적 통치방법을 말한다.

무위자연은, 박학다식한 유학자들이 천하를 통치하고 예절에 의한 제도를 완비하여 백성들 위에 군림하여 천하에 평화를 유지하자는 공자, 맹자의 유교사상과는 반대로 도가에서는 모든 백성으로 하여금 천지만물의 생성자인 도의 뜻을 체득하여 유약하고 겸손하면서도 또 한편 강인하고 미치지 않는 곳이 없는 도의 능력으로써 이 세계를 스스로 다스려 나가자는 사상이다. 따라서 도가사상은 일체의 인위적인 것을 배제하고 무위자연 하는 속에서 자유스러운 삶을 추구하자는 것이다.

작가의 작업 안에는 ‘무위자연’이 고스란히 녹아 있다. “부드러움이 내 안에도 내재되어 있는 것을 발견하고 놀랐다. 통일운동과 민중운동을 하면서 보지도, 느끼지도 못했던 당연한 것들을 새삼 발견한 것이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분명 억압과 통치가 존재한다. 하지만 부드러움도 역시 한 몸처럼 존재한다”


섬진강을 찾아 나선 것도 같은 이유에서다. 강(江)은 단지 흐르는 물이 아니다. 흐르는 강물 안에는 세상의 모든 것이 은유로 담겨있다. 스스로의 질서를 유지하며 제 몸 안에 생명을 키워내기도 하고 죽음을 존치하고 분해하기도 한다. 너무나 자명한 자연의 이치이다. 사람들이 인위를 가하지 않는 한, 강은 스스로 흐르며 스스로의 질서를 지켜간다.

그림 안에서 다시 일어서는 생성과 소멸 그리고 안개

10여 년 넘은 ‘섬진강’ 작업이다. 발품 팔아 부지런히 발원지부터 강이 흐르는 곳, 발길 닿지 않은 곳이 없다. 새벽 강을 그리기 위해 이른 새벽 강을 걸었고, 구불구불 강의 선을 표현하기 위해 많은 시간을 걸으며 사진에 담고 스케치를 했다.


그림 안에는 안개가 늘 자욱하다. 산방 문을 열면 방 안까지 들어온다는 안개. 짐짓 딴청을 부리며 작가에게 안개가 어떤 의미냐고 묻는다. “시원하지 못한 속내가 있나보다. 아무것도 확실하게 정리되지 않은 채, 시간이 흘러갔다. 기층민중, 자주, 민족, 통일 등 불과 10여 년 전만 해도 하루, 수백 번 내뱉었던 단어들이 어느 날 부터인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아무 것도 해결 된 것은 없다. 통일은 오히려 더 소원해졌다. 경직 됐던 삶, 원칙적인 삶. 사람관계에서 자연의 이치를 보며 많이 녹아 내렸고 생각하고, 젊은 날, 후회 없이 다 털어냈다고 생각한 것들이 결국은 아직도 남아있는 것 같다.”

요즘의 젊은 작가들에게도 한마디 빼놓지 않는다. “영리하고 밝은 표정이어서 좋다. 무엇을 하더라도 쟁이, 쟁이 정신, 쟁의 자존을 잃지 않았으면 한다. 다시 말하면 작가정신이다. 국가나 제도 권력, 경제 권력에 무너지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 간절하다.”

안개 짙은 섬진강은 너무 아름답다. 가슴이 먹먹할 정도다. 안개와 구름 가득한 작가의 그림은 그런 느낌을 고스란히 전달한다. 분명한 선인데도 안개와 구름에 가려 다시 집중을 하며 들여다보게 한다.

온갖 세월을 거쳐 왔기 때문에 더 아름답다. 안개 자욱한 섬진강과 작가는 이미 한 몸이다.

“단지 보이는 현상만으로 섬진강의 아름다움을 표현하고 싶지 않다. 다시 말하면, 아름다움, 감상만으로 강을 들여다보고 싶지는 않다. 강이 단지 흐르는 강이라면, 지나 온 시간들을 그곳에서 읽어내지 못한다면 단지 자연으로 존재할 뿐이다. 섬진강이 지닌 도도함과 역사성에 주목한다. 섬진강에 우리 역사의 강을 중첩하고 싶다. 앞으로의 할 일이다.”

문의 : 018-797-6582

에필로그
내가 안개에 관한 한 편의 시를 썼더니 / 한 여인이 그게 무슨 뜻이냐고 물었다 / 그때까지 내가 생각했던 건 안개의 아름다움뿐이었다. / 진주 빛과 잿빛이 뒤섞여 휘돌며 / 저물녘에 불을 켠 우중충한 오두막들을 / 빛깔로 떨리는 신비로운 점들로 바꿔놓는 안개만을 / 난 대답했다 // 온 세상이 옛날엔 한때 안개였고 언젠가는 / 모두 안개로 되돌아가리라고 / 우리의 두개골과 허파는 뼈와 살이라기보다 / 오히려 물이라고 / 또 모든 시인은 티끌과 안개를 사랑한다고, 왜냐하면 / 모든 마지막 대답은 / 결국 티끌과 안개로 서둘러 돌아갈 터이기에  - 詩 마지막 대답들. 作 칼 샌드버그

섬진강 하류를 따라 돌아오는 길은 아름다웠다. 한쪽은 산. 온통 잿빛으로 변해가는 푸른빛. 한쪽은 낮은 물과 억새들. 안개에 뒤덮여 바닥이 보이지 않는 섬진강의 습지. 차를 세워두고 오래도록 강물의 흐름을 바라보았다. 푸르도록 푸른 파란색에서 잿빛, 검정색으로 변해가는 강물 바닥까지. 오래도록.

날 세우고 살아온 오랜 시간. 손 한 번 흔들지 않고 너는 그렇게 가고 벽에 갇힌 시간은 죽었다. 닫혀있는 문 밖에서 한나절의 막막함도 부숴버리고, 한때의 거리를 들어내고 한달음의 허망함도 깎아낸다. 한군데의 중심도 뜯어내고 한마디의 말도 비워낸다.

길은 그 길인데 돌아오는 길이 낯설다. 덫에 눌려 움직일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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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 머문 자리 2009-12-08 23:13:31
시민의소리정기구독자입니다.작년부터 작가탐방 보는 재미에 푹 빠졌습니다. 지면과는 달리 웹상에는 에필로그가 있다는 것을 알고부터서입니다. 이번주 작가탐방은 작가도 선정이 좋았지면 칼샌드버그 시가 단연 백미였습니다. 독서량이 굉장하다는 생각이듭니다. 좋은작가. 좋은 시. 정말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