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를 지켜라!
지구를 지켜라!
  • 김영삼 시민기자
  • 승인 2009.12.04 22: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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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말의바보/이사카오타로/랜덤하우스중앙

▲ <종말의바보>책 표지.
내일 지구가 멸망한다면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는 건 지극히 개인적인 생각이다. 여기서 개인적이라는 것은 이기적이라거나 자기중심적이라는 말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내일 지구가 멸망한다는 소식으로 인해 소동이 일어날 것이며 그 소동으로부터 개인은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는 점에서 사과나무를 심겠다는 의지와 상관없이 내가 무슨 일을 할 수 있을지는 알 수가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의지의 표현으로서는 인정할 수 있지만 그것이 현실화될 수 있을 것인지는 도대체가 알 수 없다. 나라는 존재가 결코 혼자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정신 나간 사람들에 의해 해코지를 당할 수도 있는 것이며, 누군가의 손에 잡혀 집밖으로 휩쓸려 갈 수도 있는 것이다.

<종말의 바보>라는 이 소설은 내일이 아니라 8년 후에 지구가 소행성에 부딪혀 종말을 맞게 된다는 가정 하에 이루어지는, 한 건물에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5년간 살인, 강도, 방화, 자살 등등 혼돈기를 맞이하다가 지금은 어느 정도 진정이 된 상태에서 사람들이 어떻게 생활해가는 지를 담담하게 보여주고 있다.

노아의 방주를 찾아 어디선가 분명 생존할 수 있는 방법이 있을 것이라며 지푸라기라도 잡으려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망루를 지어 해일이 어떻게 도시를 삼키는지를 구경하고 싶다는 사람도 있으며, 가족이 사라진 자리에 새로운 가족을 만드는 사람도 있고, 복수를 꿈꾸는 사람도 있으며, 그저 묵묵히 자신이 해 오던 일을 꿋꿋하게 계속 해 가는 사람들도 있다.

종말의 소식을 전혀 알지 못하고 나중에 알게 되면서 당황해하는 사람도 있는가하면, 칩거에 들어갔다 세상으로 나온 소녀, 자살을 꿈꾸는 자 등 다양한 인생군상이 시선을 끈다.

소설이 말하고 싶은 것이야, “어떻게든 살아”, “처절하게 치열하게 살아”라고 간단히 말할 수도 있다. 아니, 맨 처음 스피노자의 구절처럼 당장 지구의 종말이 오더라도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는 자세로 살라고 말하는 듯하다.

그러나 이 소설이 갖는 힘은 단순히 그런 메시지의 전달이 아니라 그 메시지에 수긍하도록 만든다는데 있다. 개인적으로 8가지 이야기 중 가장 기억하고 싶은 것은 ‘강철의 킥복서’다.

“나에바, 내일 죽을 거라는 말을 들으면 어쩔 거야?” 배우가 뜬금없이 그런 질문을 했다. “다르지 않겠죠.” 나에바 씨의 대답은 냉담했다. “다르지 않다니, 어쩔 건데?” “내가 할 수 있는 건 로킥과 레프트 훅밖에 없으니까요.” 배우는 그 말을 듣고 웃었다고 한다. “그건 연습 얘기잖아. 아니, 내일 죽는데 그런 걸 한다고?” “내일 죽는다고 삶의 방식이 바뀝니까?” 글자들이라서 상상할 수밖에 없지만 나에바 씨의 말투는 정중했을 게 틀림없다. “지금 당신 삶의 방식은 얼마나 살 생각으로 선택한 방식입니까?”(210쪽)
“할 수 있는 걸 하는 수밖에 없으니까요”(211쪽)

내가 언제 죽을지를 안다면 삶의 방식이 바뀔까? 흔히들 말하는 예상 수명이라는 것이 있다. 그 예상 수명에 맞추어 지금 우리는 살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언제 죽을지도 모르는데 하며 살고 있는 것인가? 아마도 죽음은 일상 속에서 저 멀리 떨어져 있었을 것이다.

죽음은 나의 삶과 하등의 관계가 없는 것이라고, 아니 죽음 그 자체를 생각조차 않으며 살아가고 있을 것이다. 그러다가 느닷없이 암과 같은 시한부 판정을 받으면 공황상태에 빠지는 것이다.

내일 당장 죽는다고 하더라도 머릿속이 하얗게 변하지 않고 살아간다는 것은 가능한 일일까?

“자살하면 안 되는 이유 따위, 내가 알게 뭐냐, 멍청아! 아무튼, 절대, 죽으면 안 되는 거야. 이 녀석아, 쭈뼛쭈뼛 인생의 산을 올라와서는, 힘들고 무섭고 피곤하니 처음 왔던 길로 슬슬 돌아가 볼까, 할 수는 없는 거야.” “난, 오를 의미가 있다고 생각되지 않는다니까요” “대체 뭐냐, 넌? 난, 지금 올라가서 어떻게 하자, 따위를 말하는 게 아냐. 오를 수 있을 때까지 오르라고 명령하는 거야. 그리고 말이다, 아나 다 올라가면 말이다, 정상에서의 경치는 틀림없이 각별할 거야.”(316쪽)

경치가 각별할지 그렇지 않을지는 모른다. 시지푸스가 끊임없이 산을 오르고 또 오르듯이 살아간다는 것이 그런 일일지도 모른다. 경치를 구경할 틈조차 주어지지 않을 수도 있다.

그렇다고 손을 놓아버리면 시지푸스는 바위에 깔려 죽을 것이다. 손을 놓을 수는 없다. “살아가는 건 권리가 아니라 의무”라는 소설 속의 말이 머릿속에 메아리치는 것이 바로 이 때문일 것이다.

하루하루를 후회 없이 살아가는 것, 아니 후회 없이 라는 말을 지워도 괜찮다. 살아가는 것. 그것이야말로 위대한 일일지도 모른다. <종말의 바보>는 살아간다는 것의 위대함을 말해주는 듯하다.

이 소설은 종말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삶의 새로운 시작을 이야기한다. 강철의 킥복서가 오늘도 무수한 발차기 연습을 하듯이. 소설의 끝장을 덮으면 아려오는 심장과 함께 삶에 대한 애착이 무한정 솟아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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