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간다는 것은…
살아간다는 것은…
  • 박정복 시민기자
  • 승인 2009.11.20 2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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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명/임레 케르테스/다른우리

▲ <운명>책 표지.
‘왔다’라는 말이었는데, 새로 무슨 변화와 움직임과 전환이 생기는 것을 이 한마디 말로 다 표현했다. 예를 들면 유태인의 집에 별을 붙이는 일이 ‘왔고’, 10월 15일이 ‘왔고’, 나치 대원들이 ‘왔고’, 게토가 ‘왔고’, 도나우 강가의 사건이 ‘왔고’, 해방이 ‘왔다’.

이런 식으로 세상을 보는 것은 다른 경우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잘못이었다. 도저히 현실로는 상상이 안 되고, 하나하나 개별적인 일들에 대해서도 정확하게 어떻게 일어났는지 이해가 안 되는 이 모든 흐릿한 사건들이 마치 분, 시간, 날, 주, 달의 일상적인 순서에 따라 일어난 것이 아니라 단 한 번의 소용돌이로 갑자기 밀어닥친 것처럼 그렇게 이야기했다. 책 284p.

인간이 ‘왔다’라는 말에 의해 살게 될 때, 그건 동물의 삶과 별반 다르지 않다. 잊어버리고, 다시 사유하지 않고, 매 순간을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이기 위해 단계 단계를 밟아가면서 살지 않게 되면, 수동적인 인간이 될 수밖에 없다.

작가가 ‘왔다’라는 말을 거부하는 이유가 그것이다. 끔찍했던 수용소의 일을 잊으라는 두 노인의 말에 적극적인 반항을 하는 이유도 그것 때문이다. ‘이미 일어난 일이야 어쩔 수가 없다지만, 그 기억에 대해서는 어떻게 내가 이래라 저래라 명령을 할 수 있겠느냐고 말했다.

… “나는 그 끔찍한 일들을 전혀 느끼지 못했습니다.” ‘그러한 일이 단순히 오기만 한 것이 아니라 우리도 그리로 갔다, 고 덧붙였다.’ 그런데도 마치 모든 것이 갑자기 우리한테 그냥 왔던 것처럼, 불분명한 것처럼 그렇게 흐지부지 되고 있다고 말했다. 우리가 나중에 ‘뒤에서 돌이켜보게 된다면 지금이 그렇게 보일 것이라는 말이었다.’

소설은 작가의 자전적 경험을 살려 쓴 것이다. 상상에 의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진정성이 느껴졌고, 독일 나치 수용소를 겪은 주인공 소년의 마음의 결론이 덤덤하고 아름답게 느껴지기도 했지만, 그만큼 인간이란 존재에 대해 치 떨리는 사유를 동반할 수밖에 없었다.

주인공 소년이 어리숙한 경찰에 의해 나치 수용소로 끌려가기까지 당시 헝가리 경찰은 자신이 감금한 사람들에게 일어날 일에 대해 알지 못했을 것이다. 그들을 압송하던 어리숙함과 느슨함은 그것을 잘 보여주고 있었다. 그들은 알지 못했던 것이다.

하지만 결론적으로 주인공 소년에게 일어났던 일은 평범한 소년이 살아야했던, 겪어야 했던 삶과는 아주 달랐다. 끝없이 평범한 일상으로의 회귀를 갈구하는 소년의 덤덤하고 지루한 시선에서 그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마냥 비관적이지 않는 시각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은 수용소 상황을 일상의 차원으로 환원시키는 데서 오는 상상력의 힘이었다.

처음에 소년은 자신을 부리는 사람들에게 잘 보이려했고, 그들에게 인정을 받으려 했다. 하지만 수용소의 상황은 그런 노력이 헛된 것임을 증명한다. 오히려 더 배고파지고, 음식은 배고파지는 만큼 부족해지는 역설이 발생하는 것이었다. 소년은 요령을 배우게 된다.

감시자의 눈을 피해 게으름을 피우는 법을 배운 것이다. 일을 하더라도 최대한 몸은 천천히 움직이고, 감시자가 화내지 않을 만큼만 움직이고, 정신적으로는 상상의 나래를 편다. 소년은 매순간을 그런 식으로 버텨낸다.

거기에 자신을 도와주는 사람들에 대한 고마운 마음도 그냥 흘려보내지 않는다. 어린 아이의 시선답게 좋은 사람과 나쁜 사람에 대한 판단이 계속 등장하는데, 섣부르게 선과 악을 가르지는 않는다. 단지 자신에게 더 낫게 대하는 사람과 더 나쁘게 대하는 사람들이 있을 뿐이고, 그 사이에서 자신의 나태한 행동이나 정신 상태에서 오는 주관적인 감정도 객관화시키고 있다.

극도의 객관화로 인해 필자가 기존에 알고 있었던 수용소에 대한 이미지와 다른 세계를 펼쳐 보인 이 책이 낯설었다. 수용소에서의 엄혹한 상황과 숨 막히는 삶과 죽음의 정점에서 끝없이 견딜 수 없는 사건들만 일어날 것이라 생각했던 나의 선입견을 깨는데 이 책은 적절히 역할을 했다.

아무리 엄혹한 상황이라 해도 그 사이에는 시간이 있고, 단계라는 것이 있으며, 그 단계 속에서 인간은 끝없이 선택을 한다는 것이 이 작가가 하고 싶은 말이었다. 나는 책을 덮으면서 그것에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 현실이 아무리 바쁘더라도 내가 숨 쉬고 판단하고, 선택해야 하는 많은 것들이 있다. 다른 사람이 아무리 나쁘더라도 내가 알지 못하는 누구보다는 더 나을 수도 있고, 나 아닌 다른 사람이 아무리 좋더라도 내가 알지 못하는 누구보다는 더 나쁠 수도 있다.

그것이 삶이 가진, 사람사이 관계가 가진 매력이다. 살아가는 일은 그것을 알아가는 일이며 그것을 마음에 새기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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