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과 현대 공존하는 전라도 토종의 실험대
전통과 현대 공존하는 전라도 토종의 실험대
  • 김경대 기자
  • 승인 2009.11.19 09:4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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⑮진도 홍주

전통 제조장인들 “토종다워야 제 맛”
현대화 나선 지자체 “경쟁력 갖춰야”

14회 연재를 이어오는 동안 무등산 수박, 보성 녹차, 나주 배에 이어 홍어, 낙지, 꼬막 등 전라도 대표 먹을거리들이 얼추 다 등장했다. 그 동안은 먹거리를 중심으로 다뤘으니 연재 마지막 편에서는 여기에 곁들이면 좋을 전통주를 소개해 볼까 한다.

우선 전통주 하면 크게 소주(燒酒), 청주(淸酒), 탁주(濁酒)로 나뉘는 데 전라도는 예로부터 소주가 유명했다. 오늘의 주인공은 바로 영광의 법성포 토주와 더불어 전라도 양대 명주로 꼽히는 진도 홍주.

그 중에서도 진도 홍주는 그 빛깔과 향이 독특해 애주가들에게는 꽤 친숙한 전통주로 꼽힌다. 이는 진도군이 2005년부터 진도홍주를 명품화하겠다며 올해까지 정부 예산 120억 원을 들여 펼친 ‘신 활력 사업’의 공이 크다.

고산자 김정호도 반한 진도 홍주

▲ 홍주를 내리는 전통 소줏고리와 진도산 지초 생근.
삼별초의 최후 격전지로도 유명한 진도는 흔히 ‘민속의 보고(寶庫)’로 알려져 있다. 진도는 고장 전체가 옛 풍습이 그대로 남아있는 하나의 작은 박물관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인터넷과 첨단과학이 이룩한 현대문명을 비웃듯 진도는 아직도 당골이 죽은 자의 넋을 위로하고, 소리 잘하고 춤 잘 추는 이들이 차고 넘친다. 

술이라고 별나지 않았을까. 40도가 넘는 독한 맛은 그렇다 쳐도 레드와인보다 강렬한 선홍빛 색깔은 술잔 든 손을 주춤거리게 만드는 특별한 ‘무엇’이 있다.

진도홍주의 기원은 1100년 전 고려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원나라로부터 전래된 소주가 민간에게까지 널리 양조기술이 전파되면서 소주에 각종 초근목피와 나무열매, 한약재를 넣어 향미와 색택을 보강한 미주가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이러한 가양주 중에서 미·색·향을 고루 갖춘 전통주로 지금까지 유일하게 남아있는 술이 바로 진도 홍주다. 홍주가 남도의 끝자락 진도에 정착하게 된 배경은 항몽 삼별초군이 전했다는 설, 양반 유배인이 전했다는 설, 의료처방에 따른 독자적인 발전이라는 설 등 여러 이견이 분분하다. 

다만 백과사전에 세조 때 경상도 절도사 허종의 부인이 홍주 제조 비결을 후손에 전했는데 허종의 후손 허대(1586~1662)가 소줏고리를 갖고 진도로 낙향하여 술을 빚었다고 적고 있다.

홍주와 관련된 또 하나의 일화는 김정호와 관련이 있다. 삼천리 방방곡곡을 걸어 대동여지도를 제작한 고산자(古山子) 김정호가 진도 홍주를 맛보고 “홍매화 떨어진 잔에 봄눈이 녹지 않았나 싶고 술잔에 비친 홍색은 꽃구경 할 때 풍경이로다”라고 읊고 대동여지도를 흥선대원군에게 바치며 진도홍주를 같이 진상했다고 한다.

진도 홍주는 보리나 밀을 누룩으로 만들어 약 7일간 띄운 뒤 소줏고리를 얹어서 고아내는 과정을 거친다. 소주이슬이 떨어지는 사이에 구근식물인 지초(芝草)를 놓아 통과시키게 해 지초주라고도 불렸다. 지초는 산삼, 삼지구엽초와 함께 3대 선약으로 불리는 약초인데 항암, 항균 작용은 물론 당뇨예방과 피를 맑게 해주는 효과가 있다고 한다. 술의 알콜 농도는 약 45~48도.

60여년 홍주 빚은 허화자 명인

▲ 허화자 명인이 홍주를 빚기 위해 말린 누룩을 손질하고 있다.
홍주 맛의 비결은 누룩에서 출발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994년 전라남도 무형문화재 26호로 지정된 허화자(80) 명인을 만나러 진도읍 쌍정리 허 할머니 댁을 찾았을 때 마침 대구MBC 촬영팀이 허 할머니의 홍주 제조과정을 촬영하고 있었다.

이중헌 기획제작팀 차장은 “누룩의 효능에 대한 3부작 다큐를 제작 중이다”며 “홍주의 맛을 좌우하는 누룩, 그 중에서도 보리 누룩이 술에 미치는 영향과 효능 등을 담을 것”이라고 했다.

걸걸한 입담의 허 할머니는 기자를 보자마자 다짜고짜 “술이나 한 잔 해”하며 어제 내린 술을 술잔 가득 따랐다. 지초의 향과 색이 짙게 배인 허 할머니의 홍주는 높은 알콜 도수에도 위스키처럼 목에 걸리는 느낌 없이 부드럽게 넘어 갔다.

허 할머니는 “맛이 워뗘? 내가 만들었어도 술 맛은 좋아.”라며 은근한 자부심을 표했다. 할머니의 술 맛에서는 가마솥이 걸린 부뚜막과 부엌 천장의 검은 그을림처럼 오랜 연륜과 정성의 맛이 묻어났다.

무형문화재로 지정받고도 사업을 키워볼 생각 없이 근근이 찾는 단골손님들을 상대로 옛 방식 그대로 소줏고리만을 고집하며 전통 홍주를 빚어낸다. 

백과사전에 나오는 허대의 11대손이라는 허 할머니는 “이제 기력이 딸려서 술 내리기가 영 쉽지 않아. 이것도 언제까지 할 수 있을지…”하고 안타까워했다.

진도 홍주의 새로운 변신

▲ 진도홍주신활력사업소 지하 숙성고에 보관된 홍주 단지들. 이종호 사업소 관리담당은 “진도홍주 제조실에서 여러 방법으로 만든 홍주들은 진도군의 소중한 자산”이라며 “오랜 숙성을 거쳐 특별 상품으로 시장에 내놓을 계획”이라고 말했다.
현재 진도군에서 홍주를 제대로 만드는 곳은 진도홍주보존회를 포함해 규모의 크기와 상관없이 40~50곳 정도로 추산된다. 전통적인 방법으로 만드는 이들은 홍주의 현대화에 탐탁지 않은 반응을 보이지만 수익 다각화를 꾀하려는 진도군의 입장에서는 진도 홍주만한 맞춤거리도 따로 없었다.

진도군은 2006년 ‘진도홍주 신활력사업소’를 신설하고 관내 5개 생산업체와 함께 ‘루비콘’이라는 공동 브랜드로 홍주 현대화에 나서고 있다.

이종호 신활력사업소 관리담당은 “정부의 신활력 사업으로 진도 홍주가 선정되면서 인지도는 10배 시장성은 5배 정도 커진 것으로 추산된다”면서 “홍주 현대화 사업은 진도 쌀 소비 촉진은 물론이고 고급 양주 시장을 대체하는 측면에서도 값진 시도로 볼 수 있다”고 자평했다.

진도 홍주 ‘루비콘’은 연 내수 시장 매출 30억원, 지난해 중국, 캐나다, 미국 등 5개 나라에는 내수 시장의 1/10인 30만 불 규모의 수출 실적을 거두기도 했다.      

진도 홍주가 현대화되기까지는 표준화, 규모화가 큰 역할을 했다. 군은 46가지 단계에 이르는 전통 홍주 제조비법을 3년여의 연구 끝에 15가지 방법으로 표준화해 과정을 간소화시켰다. 상품화에 성공한 후부터는 홍보 만화 제작 등 광고 홍보에 주력하는 한편 산악인용 홍주 등 목표 타깃을 겨냥한 상품도 내놓을 계획이다.

군은 또 5개 제조업체들과 한 병 판매 시 마다 77원의 장학금을 적립하기로 해 출향민들의 애향심을 자극하고 장학사업도 펼치는 묘책도 내놓았다. 진도 홍주는 한편으로는 전통을 보존하려는 노력과 함께 산업화에도 일정 성과를 거두면서 전라도 토종의 생존 가능 모델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그 의미가 크다 하겠다. <끝>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위원회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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