억년의 고요 서린 무등에 올라
억년의 고요 서린 무등에 올라
  • 전고필
  • 승인 2009.11.13 20: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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억새 우거진 무등산을 기다렸다. 산악인들이 이름 붙였다는 백마능선, 그 말갈기 같은 억새들이 군무를 하는 모습이 그리워 산에 올랐다. 고개를 숙이더라도 결코 부러져 본적 없는 억새를 보면 나는 왜 이렇듯 삶이 신산하여 숙이지도 부러지지도 못하고 사는지 나에게 묻고 싶었다.

▲ 반야봉이 산과 산의 공중부양을 받으며 섬처럼 떠 있다.

전날 내린 비로 하늘은 푸르게 치솟았고 시야는 광활하여 저 멀리 산들의 연봉이 형제처럼 어깨 나란히 달리었다.

얼마 만에 만나는 눈 맛의 호쾌함일까. 한참을 산들의 실루엣 사이로 호남정맥의 산하를 당겼다가 밀었다가를 반복했다.

아름다웠다. 그 산에 오르기를 너무나 잘 했다는 생각이 이런 날만 드는 것은 아닌데 하필 오늘 날을 택한 내가 사랑스럽기까지 했다.

거기에 약간의 미흡함이 있었다면 저 산들의 합창 속에서 그 이름 다 호명하지 못하고 그저 막연하게 아름답다고만 말하고 뭉개 버리는 야속함이었다.

왜 숲은 볼 줄 아는데 나무가 갖는 낱개의 소중함에는 인색한지가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여튼 그 와중에서 그나마 알 수 있는 산은 지리산의 반야봉이었다. 중앙 부위가 엉덩이처럼 들어간 모습에서 반야봉이라는 것을 단숨에 알 수 있었던 것이다.

붉디붉은 산의 연봉을 넘어서 금새 달려가 안길 수 있을 것 같은 반야의 모습을 또렷하게 눈에 새기며 장불재로 향했다.

함께 한 문화유산해설사 이애심 선생님은 내게 장불재는 화순 이서사람들의 입장에서는 장보러갈 때 넘는 재라고 해서 “장볼재”라는 설이 있고, 규봉암의 스님은 그 모습이 길게 누워있는 부처님의 모습으로 보여 “長佛재”라고 하신다는 귀띔을 한다. 아무렴 어떻겠는가 마는 두 가지 설이 다 어울리는 것이 장불재이다.

모든 이름에는 시대가 조영하게 되는 것인데, 무등산의 이름마저도 시각적, 정신사적 의미에서는 무지개를 뿜는 돌이라고 하는 ‘무돌’이 있고, 종교적 의미에서는 부처님의 세계는 등급이 없어 최상의 곳이라는 의미를 지닌 ‘무등’이 있는 것처럼 말이다.

▲ 제발 자연의 조화였으면 하는 바람이 입석대에서 간절하였다.
입석대 들머리에서 장불재를 바라본다. 억새 능선이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불현듯 찾아온 추위가 억새꽃의 장관을 앗아가 버렸던 것이다. 그 또한 자연의 이치이지만 야속해 보였다.

기대했던 풍경의 이면에서 잠시 아쉬움이 일었지만 다시 두리번거려 보니 억새의 영역이 많이 줄어들었다. 식생에서 우생하고자 하는 아귀다툼 사이에서 수많은 세월 무등산을 지켜왔던 억새의 영토가 줄어들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 자리에는 잡목과 더불어 참나무들이 치밀어 북상하는 중이었다. 자연은 그렇게 서로 밀고 당기며 자리를 내어줄 줄 아는데 우리네 인간사는 그렇지 못한다는 것 또한 새겨지는 대목이었다.

내친 김에 입석대로 올랐다. 새로 조성된 데크에 올라 돌올한 기상의 입석대를 올려본다.

하늘의 들보처럼 솟구쳐 있는 모습 사이로 흰 구름이 흘러간다. 의연하고 또 의연하여 더 말을 잇지 못하는데 정 중앙에 입석 한 기둥이 무너져 내려 있다.

억겁의 세월을 견뎠는데 허망하게 우리 시대에 무너지고 있는 것이다. 대체 무슨 사연일까. 9천만 년 전이거나 그 보다 더 빠른 1억 2천만 년 전이라고 하는 나이를 먹었는데 말이다.

이 주상절리대 생성의 수수께끼 속에는 백악기의 빙하시대에 화산의 폭발로 지하의 용암이 솟구치면서 지반을 형성하는 축과 지상부에 솟아나 차가운 공기에 노출되며, 수축되어 각을 세우는 석영안산암 벽이 형성되었던 과정이 있다.

그 뒤를 이어 각과 각 사이에 빗물이 파고들고 바람이 삭아들면서 풍화와 침식에 의한 간극이 형성되어 지금의 주상절리대를 형성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지공너덜, 덕산너덜을 비롯한 네 곳의 너덜겅은 입석대와 같은 선바위가 구른 것이 아니라 밀린 흔적이라고 한다. 하지만 저 입석은 분명 무너져 내린 것 같아 보였다.

▲ 상서로운 기운이 넘치는 서석대의 늦가을 모습에는 세월 앞에 어쩔 도리 없는 인간의 모습이 겹쳐 보였다.

자연이 아니라 인공의 힘이 작동했을까? 조바심 속에서 무너져 내린 입석에 조의를 표하고 서석으로 올랐다. 시내가 한눈에 조망되는 곳에서 역설적이게도 무등은 우러러 보는 산일  뿐만 아니라 앵기는 산이라는 느낌을 더욱 깊게 받았다.

돌아오는 길 잔뜩 낀 먹구름이 몰려왔다. 나의 운명일까 무등의 운명일까? 아침의 환한 기운은 장불재의 억새처럼 사라지고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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