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강점기 4389명의 친일 행적을 기록한 친일인명사전이 공개되면서 사전에 수록된 인물의 후손들이 명예훼손 소송을 내는 등 반발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
하지만 청산되지 않은 과거 행적을 고백하고 사죄의 뜻을 밝힌 친일 당사자들과 그 후손들도 있다. 사전에는 친일 행위자에 관한 기록뿐 아니라 ‘친일’을 반성하고 책임지려 한 사람들에 관한 ‘반성록’도 실렸다.
일제 당시 충청남도 광공부장이었던 현석호씨.
그는 “해방되던 날부터 나는 친일관리로서의 거취 문제에 대해 깊이 생각해 봤다”고 그의 자서전 『삶의 고백』을 통해 운을 뗐다.
현씨는 “일정 때 고급관리로서 일제를 반대하는 투쟁 대열에 참여하지 못하고 자신의 안일과 출세를 위해 힘썼다”며 “관리생활 동안 일제의 차별대우와 모멸감에서 해방된 기쁨은 컸지만, 도의적 죄책감을 뿌리칠 수 없었다”고 고백했다.
당시 그는 1945년 9월 충남 도지사로 부임한 미군정 육군대령에게 사표를 제출함으로써 도의적 책임을 다했다.
김남식씨는 식민지 때 초등교육을 담당했던 교사였다.
그는 “1939년 첫 발령을 받았다. 당시 우리말(한글)을 쓰는 아이에게 손바닥만 한 ‘패’를 줬다”며 “다른 아이가 한글을 쓰면 그 패를 건네는 식으로 하교 시간에 최종으로 그것을 들고 있는 아이는 교무실로 불려오게 됐다”고 한겨레신문(2006.2.28)을 통해 과거를 회상했다.
그는 “‘내가 교사로서 참 나쁜 짓을 했구나’ ‘민족반역자였구나’라고 느꼈다”며 일제 식민지 때 교육을 담당한 사실을 반성했다.
김씨는 사죄의 의미로 하루도 빠짐없이 동대문구 회기동 주변의 쓰레기를 줍고 있으며 ‘초등학교’ 명칭 바꾸기 운동에도 큰 공헌을 했다.
후손들의 사죄도 담겨있다.
파인 김동환의 아들 김영식씨는 “아버지가 일제 말엽에 저지른 치욕적인 친일행위를 뉘우치고 변절고충을 고백한다”며 “가족을 대신해 국가와 민족 앞에 깊이 머리 숙여 사죄한다”고 부친의 일대기를 다룬 『아버지 파일 김동완-그의 생애와 문학』을 통해 밝히고 있다.
경찰총경으로 은퇴한 김씨는 김상덕 반민특위 위원장의 후손들도 만나 직접 사죄했으며, 현재 민족문제연구소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후대들의 반성에 관한 내용으로는 민족문학작가회의가 2002년 8월 14일 ‘모국어의 미래를 위한 참회’자리에서 친일문인 명단 및 친일문학작품 목록을 발표한 일이 실렸다.
민족문학작가회의는 “친일문학인들이 국정교과서에 버젓이 활개를 치는 데 이들에 대한 평가를 공식화하지 못한 책임이 크다”며 “결과적으로 민족정기가 훼손되고 겨레 모두에게 심대한 상처를 주었다”고 말했다.
이들은 “‘친일’이 압도적인 폭력에 맞설 수 없는 개인의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라고 동정론의 잣대를 들이대는 것은 모두 기만적인 변명에 불과하다”고 지적했다.
시대적 가치를 왜곡시킨 친일문학으로 인해 모국어의 도덕성을 훼손했던 인물과 상속자에 대한 책임을 물어야 한다는 주장이다.
청산되지 않은 역사는 현재의 굴레로 남는다. 친일을 인정하고 용서를 구하는 모습과 기득권의 힘을 바탕으로 군림하는 모습 중 어느 것이 옳은지 평가하는 일은 참으로 어렵다.
하지만 “언제까지 과거에 사로잡혀있을 것이냐”라는 반발 속에서도 우리가 과거를 조명하는 이유를 꼽으라면 아마 “현재의 삶이 과거로 부터 잇닿아 있다”는 부정할 수 없는 사실 때문일 것이다.